오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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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가 우리에게 다가온 순간에 대해 반문해보자. 트리의 형상은 언제부터 우리에게 행복과 기쁨의 정서를 불러일으키는 순간을 제공하였나. 그리고 어떻게 이러한 정서적 형상은 우리 모두에게 통용되는 언어로 자리 잡았나. 나에게, 그리고 우리 각자에게 트리는 무엇인가.

전봇대에서 철거되지 않고 남겨진 크리스마스 트리를 보았다. 장신구가 모두 떨어진 채 남겨진 트리는 우리가 공유하는 기쁨이나 미래에 대한 희망의 지표가 떨어져 나간 상태이다. 그와 동시에 이것은 다시 다가올 크리스마스 축제와 눈부시고 따스한 마음을 떠올리게 한다. 그런데 모두에게 통용되는 트리의 형상은 우리의 삶에 어떻게 자리 잡고 있으며, 앞으로 도래할 희망적 정서에 대한 미래인 양 우리의 눈앞에 등장하는 것일까. 트리의 형상은 각각의 종교가 지니는 환경, 문화적 관습, 이념을 떠나 우리 모두에게 통용되는 듯한 희망적 미래이자 상징의 구조만을 발췌하여 나타난다. 따스함은 사람의 마음을 감동케 하고 동일한 정서를 공유하는 이의 마음을 평화롭게 한다. 그리고 역사적 기술(記述)에 의해 돌출된 형상은 ‘모두’의 마음을 평화롭게 하는 것을 근거 삼아, 상상적 미래와 정서의 지표로써 우리의 삶에 자리 잡는다.

형상에서 비롯된 평안은 심리적인 안정감을 제공하기에 형상의 발생 과정과 역할은 추궁받지 않는다. 선형적인 시간선으로 기술된 역사가 정서적 형상을 토대로 희망 혹은 평안이라는 단편적인 미래를 지표할 때, 우리는 해당 지표가 지시하는 곳으로 이끌린다.

또한 ‘모두’라는 단어가 주는 통용성은 그 자체로 편안하고 유의미하며, 수용하기에도 매력적이다. 그렇기에 이것은 서로 다른 시공간에서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트리의 상이한 형상, 이에 내재하는 믿음의 표출과 전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이념적 충돌을 여과 없이 동일시한다. 통용되기보다 불화하며, 유사하기보다 상이한 트리의 몸체는 ‘모두’를 위한다는 통용적 의의에 의해 상투적이고 반복적인 단일한 형상으로만 남는다. 이렇듯 이러한 형상이 발화하는 정서는 우리로 하여금 선형적인 역사의 시간선 안에서 역사적 주체가 기술(記述)하는 미래만을 응시하게 한다. 이는 곧 ‘모두’에게 통용되는 미래로써 우리의 눈앞에 도래한다. 합의하지 않은 ‘모두’의 형상 속에서 각자의 시선과 삶의 방향은 단일하며, 개별의 존재, 염원, 정서는 역사적 주체가 기술(記述)하는 미래를 위한 기호이다. 소실된 개별의 언어는 역사를 기술하는 주체, 개별의 형상과 몸체, 이에 내재하는 관념과 상징의 불화를 응시할 때에서야 비로소 드러난다.

종교에는 원형(元型)적 형상이라는 개념이 있다. 원형(元型)의 발생은 인간의 본능, 본성, 진리 등의 개념처럼 모두에게 통용되는 고유한 감각과 이것이 지표하는 대상이 존재한다는 환상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서로 다른 의도와 목적을 지닌 갈등과 충돌을 선형적으로 바라보는 역사를 벗어날 때, 이미 원형은 부재(不在)하며 이를 수용해야 할 이유 또한 사라진다. 우리에게 남은 일은 각자의 삶에서 발생하는 서로 다른 존재로서의 환경과 시간, 그리고 이를 동일시하는 선형적인 역사의 기술(記述). 단일화된 형상적 기호의 충돌 그리고 그 안에서 발생하는 존재와 형상적 의의를 응시하는 일일 것이다. 이는 비로소 모두의 미래를 지표할 수 있다는 환상에서 벗어나서 개별의 미래를 꿈꾸는 일, 즉 역사와 과거의 믿음이 만들어내는 허구적 미래가 아닌 형상을 불신함으로써 존재를 상상하는 일일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