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의 사방에서 울리는 네 겹의 목소리는 동시에 서로 다른 노래를 흥얼거린다. 선곡은 보아의 ‘아틀란티스 소녀’부터, 번안곡 ‘클레멘타인’, 중국어 노래 ‘愛的代價’, 영화 비긴어게인의 삽입곡 ‘A Step You Can’t Take Back’까지 다양하다. 노래는 계속해서 바뀌고, 네 겹의 목소리는 서로 혼란스럽게 겹치거나 멀어진다. 듣는이는 그 나직한 혼란 속에서 익숙한 멜로디를 잡아내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곧 다른 노래와 가사의 침범으로 인해 흐려지고 멀어진다. 네 겹의 노래 사이를 오가며 소곤거리는 목소리는 ‘한국인’과 ‘한국 사람’에 대해 이야기한다. 한 사람의 의문 같기도, 여럿의 대화 같기도 한 이 속삭임은 끊임없이 불분명한 경계를 헤맨다.
다채널 영상은 뮤직비디오와 리릭비디오(lyric video)로 이루어졌다.
뮤직비디오는 익숙하고 전형적인 서울 풍경 위에 유령처럼 덧씌워진 사람의 형상을 비춘다. 등장 인물은 서울의 다양한 장소에서 곡의 리듬에 맞추어 걷고, 발을 까딱거리고,
고개를 끄덕인다. 리릭비디오는 네 겹의 목소리가 부르는 노래 가사와 속삭임을 네 겹으로 엉킨 타이포 영상으로 제시한다. 이는 사운드 작업의 청각 장애 배리어프리를 시도하는 동시에, 혼란스러운 흥얼거림의 정체에 대한 단서를 제공한다.
<창백한 국가>의 모든 노래는 설문조사에 의거해 선정되고 구성되었다. 스스로를 ‘한국인’, ‘한국 사람’,
혹은 ‘한국 국적자’로 정의하는 다수의 사람들이 자신의 삶과 노래에 관한 질문에 답했다. ‘양육자와의 추억이 떠오르는 노래’, ‘주변 사람들이 모두 알 것 같은 노래’, ‘삶이 가장 힘들었던 시절 들었던 노래’ 와 같은 질문은 곡의 마디 및 리듬 구성 기준이 되었다. 이는 질문과 관련된 몇 마디 속삭임을 통해 어렴풋이 드러난다.
‘한국인’,
‘한국 사람’이 지칭하는 범위는 종종 끝간 데 없이 넓고, 때로 아주 좁다.
가끔은 은연중에 아주 좁은 나잇대만을 상정하기도 한다. <창백한 국가>는 노래를 통해 그 다양한 삶의 모습을 불러낸다. 그리고 그 사이의 교집합을 통해 ‘한국인’, ‘한국 사람’이라는 흔하고 불투명한 개념을 정의하고자하는 불가능한 시도를 계속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