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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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즈비언이 셋 이상 모이면 인권 운동을 한다.’라는 레즈비언이 셋 이상 모이면 자조적으로 내뱉던 문장을 이렇게 이야기해본다. ‘레즈비언이 셋 이상 모이면 불주사 자국에 관해 이야기한다.’고.
어깨에, 짧은 옷을 입지 않으면 쉽게 보이지 않는 자리에 위치한 불주사 자국은 그들의 살성[1]에 따라 다르게 자리한다. 각각의 흉터들만큼 달랐던 어린 시절과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이야기하는 과정은 자기증명과 같다. 그러나 이들의 자기증명 방식은 사회에서 통상적으로 이루어지는 것과는 다르다. 레즈비언이 스스로의 정체성을 드러내지(coming out) 않는다면 그가 맺는 내밀한 관계는 우정으로 쉽게 치환되며 드러낸다 할지라도 이를 끊임없이 우정, 혹은 사랑이 아님을 증명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이들을 우정 혹은 사랑의 범주로만 인식하려 드는 (한국) 사회 내에서 그들은 각자의 역사, 생애, 관심사를 드러냄으로써 서로를 포착하게 된다.
불주사와 같이, 배꼽 역시 각자의 역사를 증명해 보이는 역할을 한다. 모체로부터 영양분을 공급받기 위한 연결고리였던 탯줄은 배꼽의 형태로 그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다. 과거에 누군가와 연결되었음을 상기하고 있지 않더라도, 배꼽은 그 순간을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배꼽은 불주사와는 약간 다른데, 불주사는 서로 간의 형태가 닮지 않아도 유사성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대화를 끌어내는 반면, 배꼽은 분절성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레즈비언 역시 누군가에 의해 재생산된 결과물이지만, 사회적 인식에 의해 재생산의 가능성으로부터 멀어진 상황에서 후세대 그리고 앞세대와 이어지는 방식을 떠올렸을 때 배꼽이 지니는 비연속성은 확연히 드러난다. 하지만 그렇기에 배꼽은 레즈비언에게 중요하다.
“역사적 기록으로 판단컨대, 레즈비언은 단 한번도 집단적 응집력을 가진 적이 없었으며, 그런 경우라도 오래 지속된 적이 없었고(최근 몇 십년을 떠올려 보라) 극히 일부 레즈비언들이 그런 성격의 집단에 소속되어 있을 뿐이며, 이들 사이에 상호접촉은 거의 없었다. 그렇지만 레즈비언들은 사회적 실천, 관계, 지역적 관습, 어휘, 상징 등을 다양하게 유지해 왔다. 개인, 커플, 이웃 사촌들끼리 글, 공예품, 기록 등을 남겨서 레즈비언으로서의 그들의 생활과 통찰력을 전해왔다.
(중략)
레즈비언 문화를 가르치려면 탐정수사의 일을 가르치는 것이 필요한데, 사물이 나타나 보이는 것과 실제는 어떻게 다른지를 구별할 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탐정수사를 가르치는 일은 의도적으로 검열받아 왔거나 암호화되어 온 것들을 식별하는 방법과 함께 다른 사람들은 놓쳐버리는 일상적인 것들을 주시하는 법을 가르치는 것을 포함한다.”[2]
과거 레즈비언은 사회로부터의 안전을 위해 스스로를 숨기고, 그들만의 코드로 소통했다. 더불어 이러한 위장은 사회적 세습이 불가하므로 세대 간의 단절을 필연적으로 야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현상 자체는 계속해서 이어져 왔는데, 현대의 레즈비언은 그 분절된 역사를 이해하는 과정에서 ‘암호화’된 것들을 해독하고, 혹은 드러나지 않은 관계성을 포착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어떠한 사건 혹은 사물이 내포하고 있는 함의를 여러 방향으로 해석하는 눈을 가지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비단 유럽, 혹은 미국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한국 레즈비언 역시 분절된 혹은 은폐된 역사를 추적하는 방식으로 그들 존재를 찾아낸다.
레즈비언의 존재는 그 불연속적인 역사에 의해 부정할 수도, 긍정할 수도 없게 된다. 이들의 존재는 쉽게 은폐되는 듯하지만, 한편으로 아주 다른 시간, 다른 곳에서도 여전히 ‘발생’한다. 그렇기에 레즈비언의 배꼽은 오히려 다른 연결, 즉 모성 신화나 여타 덧씌워진 의미로써 작동하지 않고,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 낸다. 그들의 배꼽은 아주 다른 곳에, 같은 위치에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1] 살갗의 성질
[2] 클로디아 카드, 『레즈비언 선택』 인간사랑, 2004. p.40~43
<뫄뫄와 뭐뭐> pigment print, 364x515mm, 2021
<뫄뫄와 뭐뭐> pigment print, 500x700mm, 2021
<Pair Play> two channel video, 07’39”,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