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ll Promise To Find The Way Out, 2016 ~ 2020
이것은 5년간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내가 겪은 성폭력 피해에 대한 보고서이다. 성폭력 피해 생존자로 미술계라는 좁은 생태계에서 어떤 일을 당했고 어떤 대응을 했으며, 어떤 결과를 얻었는지 정리했다. 이 작업은 예술에서의 작업보다 보고서 작업에 훨씬 가깝다. 그것을 알면서도 왜 이것을 굳이 미술 대학의 졸업 전시에 전시하는가?
5년간 예술 대학에 다니며 학교에서 예술보다 어떻게 하면 예술계 안에서 성폭력 피해자가 생존할 수 있는지 더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리고 예술이라는 대명제가 전시라는 형식에 담길 때, 그 안에 가해자와 피해자가 함께 존재할 때, 예술계가 얼마나 터무늬없이 피해자의 목소리를 지우는지 피해자의 피해사실을 한낱 소문으로 방치하고 그것을 기화 시키는지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기 때문이다. 그런 행동들은 세대를 불문하고 예술계 안에서 튀어나왔다. 그런 생태계에서 아무 일 없던 척 예술로 읽히는 행동을 하기 거북했다. 하기 싫다. 무엇보다 20대가 된 이후부터 도미노처럼 또래 여성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을 몇년 간 지켜본 개인의 입장에서 나에겐 학교가 가르쳐준 예술이라는 우회로를 통할 충분한 시간이 없다. 나 역시도 매년 한번씩 자살기도를 하고 응급실에 실려가거나 좁은 원룸에 빈사 상태로 있기를 반복하고 있기 때문이다.
2020년, 1년 동안 어떻게 하면 나의 피해사실이 사적인 소문으로 유영하다가 사라지는 것이 아닌 공적인 성격을 띄어 나를 보호해주는 방패가 되어줄 수 있을지 고민하다가 졸업 전시에 예술 대신 피해사실을 보고하기로 결심했다. 그 전에 법적 대응, 공공기관이나 학교를 통한 신고, 주변인들을 통한 가해자와의 합의, 연설하기 등등 ‘공적인’ 성격을 띌 수 있는 것은 자살하고 싶지 않은 선에서 모두 시도해봤다. 하지만 그때마다 ‘공적인’ 성격을 띌 수 없게 만드는 공통의 장애물있었다. ‘사실적시 명예 훼손죄’와 ‘가해자의 인권’에 치중된 법률 시스템이 바로 그 장애물이었다. 심지어 학내 인권센터를 통해 가해자의 징계를 받아내도, 그것을 가해자의 실명과 함께 타인에게 말하면 나는 법적 처벌 대상이 된다. 가해자 스스로 잘못을 시인하는 것을 많은 이들이 목격하게 만드는 방법 역시 ‘사과를 강제하는 것은 위헌’이라는 판례가 있기에 쉽지 않다. 무엇보다 공공의 것은 사적인 것보다 느리며 보수적이다. 그 느린 속도로 내가 원하는 결과를 받아볼 때까지 과연 내가 자살하지 않고 살아있을 수 있을지를 생각해야만 했다. 결국 보고서라는 공적이지도 사적이지도 않는 애매한 영역과 형식까지 밀려났다. 애매하기 때문에 처벌받지 않을 수 있다.
강박적으로 가해자들이 남긴 피해의 증거를 수집했다. 그 계기가 되었던 것이 주변에 있던 또래 여성의 자살이었고 그 소식을 접한 내 친구가 유언장을 쓰고 있다고 얘기한 순간이다. 우리가 모두 죽고 나면 성폭력 피해사실을 증명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유언장에라도 그것을 적어 놓겠다는 친구의 말이 이 세계가 얼마나 잔혹한지 상기 시켰다. 이 억울함을, 분노를, 공포를 자살해야지 겨우 알아줄까 말까 고민하는 사회라니 너무나 고통스러워 죽고 싶은 것인데 내가 영면하면 가해자가 안심하며 살 수 있다니. 여성이 죽을만큼 고통받지 않아도 이것을 공적으로 만들 수 있지 않을까하는 기대가 날 여기까지 움직였다. 그러나 결론은 불가능하다로 귀결되었다. 죽을 만큼 고통받지 않고 내 피해사실을 입증할 수 없도록 사법체계와 공적인 시스템이 형성되어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법적인 대응을 선택할 수 밖에 없는 개인들이 있다. 그 개인들이 성폭력 피해로 인해 법적 절차나 공적인 대응을 해본 지인이 주변에 있을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 거의 없다. 인간의 체력과 정신력은 한정적인데 소모적인 방법만을 거치다가 지쳐 쓰러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조력자’가 필요하다. 자살하지 않기 위해 기댈 수 있는 쉼터가 필요한데 공적인 쉼터나 단체들은 365시간 대기자가 만원이다. 코로나 이후 상담을 한번 받는 것도 심각할 정도로 어려워졌다. 운이 좋다면 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해당 기관에 방문하다보면 해당 기관 역시 경제난과 인력부족으로 위태로운 경우가 태반이다. 우리, 즉 20대 여성은 엄청난 속도로 죽어가고 있다. 난 내가 겪은 일련의 성폭력 피해 생존자로서의 경험을 무의미하거나 무가치한 것으로 만들기 싫다. 공적인 판례로 남을 수 없다면 난 개인의 보고서로 남아 한 없이 가벼운 데이터가 되어 검색 중인 또래 여성에게 닿을 수 있는 것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겠다.
1. 조력자 만들기
여성 민우회 - http://womenlink.or.kr/affiliates/sexual_violence_definitions
한국 성폭력 상담소 - http://www.sisters.or.kr/load.asp?subPage=220
성폭력 가해자를 상대로 싸우는 혹은 싸움을 계획하고 있는 여성이 있다면 절대 혼자 싸우려고 하지 말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공공기관, 작은 규모의 여성센터, 학교 내 인권센터를 경유해서 나를 소모시키지 않고 대신 싸워주거나 나를 지켜줄 수 있는 법률 자문가나 상담가와 같이 싸워야 죽지 않을 수 있다. 자금적인 여유가 된다면 꼭 좋은 로펌에서 조력자를 찾아야한다. 여성 민위회나 한국 성폭력 상담소는 비교적 규모가 커서 웹사이트에서 유용한 정보를 얻기 좋다. 하지만 법률자문이나 대면 상담은 서둘러 받을 수 없는 상황인 경우가 많다. 그럴 경우는 자신이 거주하는 구에서 운영하는 성폭력 상담소로 범위를 좁히거나 금전적 여유가 된다면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법조인을 만나는 것이 좋다. 법률 자문은 무료거나 크게 지출이 발생하지 않으니 여의치 않으면 기관을 거치지 않고 자문을 구할 수도 있다. 시간적 체력적 여유가 된다면 서두르지 않고 정보를 모으는 것도 방법이다. 이런 전문가와 함께해야 내가 당한 성폭력이 어떤 공적인 항목에 해당되고 어떤 자료를 효과적으로 모아야하는지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 아무것도 여의치 않다면 범위를 더 좁혀서 학교 선생님, 친구, 가족에서 같이 잠깐이라도 싸워줄 사람을 찾아야한다.
2. 개인 건강 체크하기
공적인 절차에 들어가면 기본 1~2년 동안 싸워야 하고 그 동안 지옥같은 기억을 여러번 복기해야하고 치명적인 반박이나 조롱 등 심리적인 부담을 줄 수 있는 요소를 매일 접하게 될 것이다. 때문에 건강, 돈, 거주 환경을 꼭 고려하고 싸움에 들어갔으면 좋겠다. 개인의 가치판단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지만 치료를 하지 않고 투쟁을 선택하는 것은 자살할 리스크가 너무 크다. 우울증 및 기타 정신 질환이 있다면 치료나 상담을 병행하며 공적인 절차를 진행하자. 또한 정신 건강이 회복되지 않으면 자연스럽게 몸도 약해지기 때문에 언제든 치료받을 수 있는 환경을 최대한 구축하는 것이 중요하다.
자살을 선택할 수 밖에 없을 때 날 죽지 않게 해줄 안전장치도 미리 설정해 놓는 것도 중요하다. 그 안전장치는 병원이 될 수도 심리치료가 될 수도 가족이나 취미 등 개인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지만 최대한 여러겹 안전장치를 만들어 놓지 않으면 중간에 영면하거나 빈사 상태로 집에서 허덕이고 있을 가능성이 너무 크다.
이렇게 여러번 리스크를 이야기하는 것은 사적으로 트라우마를 곱씹을 때의 고통과 그것을 공적인 것으로 치환할 때 겪게 되는 고통은 또 다른 종류의 것이기 때문이다. 아예 모르기에 쉽게 용감해질 수 있다. 아무리 고통을 감내할 각오가 되어있다고 느껴도 막상 겪으면 견디기 힘들다고 느껴 크게 무너질 수 있다.
3. 금전적 여유 확인하기
법률, 치료에 지출이 막대하지 않더라도 공적인 싸움을 이어나가는 동안 왕성하게 경제활동을 하기 어렵다. 중간에 경제활동을 포기하게 될 만큼 한계에 몰릴 때가 많다. 이럴 때는 식비나 월세도 어려울 수 있고 빚을 낼 신용등급이 아닌 경우도 있을 것이다. 때문에 경제적 능력이 없어진 날 보듬어 줄 가족이 존재하는가? 안전하게 돈을 빌릴 수 있는 타인이 있는가? 도 현실적으로 고려해야한다. 공적인 싸움은 예상했던 기간보다 몇 배로 더 길어질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금전적 여유가 있는지. 경제활동을 계속 할 수 있을지 한번 체크해보자
4. 인간관계 체크하기
가까운 사람에게 성폭력을 당했을 때 여러 지인들이 얽혀있어 2차 가해를 당하거나 주변인들로부터 정신적 타격을 입을 가능성이 굉장히 크다. 특히 공적인 단계를 준비할 때 주변인들이 증인으로 소환되기 때문에 자신의 편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가해자를 옹호하거나 하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한다. 이건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이라 보편화할 수 없지만 나의 경우에는 나의 피해사실을 이야기했을 때 가해자와 바로 연을 끊었던 사람들이 끝까지 옆에 남아 있어줬다. 연을 끊었다는 의미는 공동체나 직장 안에서의 가해자에게까지 연을 끊을 수 있는 사람을 말한다. 이해관계로 얽혀있어 가해자와 쉽게 연을 끊을 수 없는 사람은 언제 상대방을 옹호할지 모르는 일이기 때문에 초반부터 마음에서 비워내는 것이 좋다. 또한 특별한 유대감이 있거나 상대방에게 사명감이 있어 믿을 수 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나서서 도와주는 경우는 거의 없다.
5. 한계치 설정하기
위에 고려사항을 어디까지 포기할 수 있는지 미리 정해두는 것이 좋다. 개인적으로는 싸우는 기간을 설정해 놓은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 계획 단계에서 포기할 수도 있지만 중도 포기하는 경우에도 한계치가 명확하면 포기하고 다른 방식으로 나를 도울 수 있는 것들을 찾아내기 훨씬 수월하다. 시간, 돈, 건강, 인간관계, 커리어 등이 계속 깎여나가기 때문에 마지노선을 하나 설정하는 것이 좋다.
6. 한계가 명확하지만 강행하고 싶을 때
공적인 싸움을 강행하고자 할 때 한계가 명확해지는 순간이 찾아올 수 있다. 이때 이미 한계인 걸 알지만 강행 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 때는 “가해자와 관련된 것”이 주변에 계속해서 있는지 살펴보자. 학내에서 벌어진 일이면 학교에 속해 있는 것만으로도 트라우마를 지속시키는 역할을 한다. 트라우마가 재생되는 동안과 트라우마 요소와 멀어졌을 때 갖게 시각은 매우 다르다. 만약 트라우마를 재생시키는 요인을 공적인 싸움없이 빠져나올 수 있다면 먼저 그것에 힘을 쓴 후에 다시 한번 공적인 절차에 대해 생각해보자.
위에 경우가 해당이 안 된다면 여러분은 아마 어떤 방식으로든 가해자와 싸워야지만 가해자로부터 안전해질 수 있는 경우일 것이다. 하지만 승산이 아무것도 없다고 느껴진다면 1. 조력자가 있는가? 2. 정신/육체적으로 건강한가? 3.금전적으로 여유가 있는가? 4. 인간관계가 안정적인가? 최소한 이 4가지 항목 중 하나라도 안정적으로 만든 후 싸움을 시작하자. 4가지 다 없는 경우 생존확률이 너무 희박하다. 공적으로 지게 되었을 때 에어백이 되어줄 것들이 있어야 자신을 납득시킬 수 있는 여유를 갖을 수 있고 여유가 있어야 포기하거나 다음 싸움을 준비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