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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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뉴얼 오브 레미

 기억을 재생하는 과정에 대해 생각해 본다. 누군가에게는 유쾌하고 행복한 현재일 기억의 뒤늦은 재생에 대해 생각해 본다. 나는 그 시간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 사진이나 홈비디오 등 물리적인 증거가 남아있지 않은 것만이 유일한 이유는 아니다. 말로 전해듣는 것보다 추측해야 했던 일들이 더 많을 때가 있다. 그러나 앞뒤를 알 수 없는 오류가 많은 기억일지라도, 어떤 이들은 의무와 애정으로 그 기억의 재생을 끊임없이 지속해야 한다.

‘레미’는 영상에 삽입된 애니메이션의 제목(으로 추정되는 것)이다. 필름의 포장지에는 어린 소녀가 그려져 있었으나 정작 그 안에 들어있던 것은 전혀 다른 애니메이션이었다. 우스꽝스러운 조류 캐릭터들이 나오는 약 11분가량의 필름은, 소리가 나지 않으며, 오래된 기계의 한계로 한 번에 끝까지 볼 수 없어 재생과 역재생을 반복해야 한다. 이 재생에는 물리적인 오류와 오작동을 보수하는 과정이 따라온다. 그 과정의 매뉴얼은 기계의 원래 주인이 남긴 두루뭉술한 말에 기반해 스스로 작성해야 한다. 디지털이 아닌 영상의 지지체를 접해 본 적이 없는 세대로서는 당황스러운 일이다. 어떠한 무력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보수 과정이 반복되면 예상치 못한 중단에 점점 익숙해진다.

 
남은 유령

 오랫동안 빛에 노출된 실크스크린 판을 재사용할 때는 탈막제를 뿌려 표면을 깨끗이 닦아내야 한다. 그러나 오랜 시간 유착되었던 감광액은 얼룩을 남긴다. 이 얼룩은 나의 힘으로 통제할 수 없는 자국이다. 얼룩을 닦아내려 스크린을 강하게 문지르면 얇은 실크가 찢어진다. 형상이 지워진 판 위에 잉크를 넣어 찍어내면 남은 얼룩이 공백으로 나타난다. 에디션을 계속해서 찍어내면 잉크가 넘치거나 판이 막혀 예측할 수 없는 형상이 새겨진다. 탈막제로도 지울 수 없는 공백은 스크린 위에 축적된 시간을 보여주는, 유령처럼 응축된 데이터이다. 빈 공간에는 판 위에 새겨졌던 이미지에 대한 추측이 남는다. 그 데이터에는 과거에 나 스스로 의도를 가지고 생성했던 이미지가 포함되어 있다. 노광을 위해 만든 이미지들을 무작위로 떠올려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판이 지나온 시간을, 전체 데이터를 가늠해낼 수는 없다.


필경

 이미지로 사고하는 것이 어려워질 때가 있다. 미지근한 열정과, 그것마저 따라가기 어려운 미숙한 실력은 스스로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게 한다. 작업을 위한 단계로서의 드로잉 대신 즐거움을 위한 드로잉을 시도해 본다. 노트를 불안과 걱정으로 채우는 대신 몸을 움직여 본다. 종이 대신 아연판을 니들로 긁어 드로잉을 새기고, 그라운드의 틈을 부식시키고 잉크를 채운다. 이미지에 선택적으로 복수성을 부여해 본다. 마음에 드는 것과 들지 않는 것을 고르고 언제든 다시 찍어 본다. 이미지보다 텍스트가 가까워질 때 남았던, 형식에 맞춰 쓴 글 대신 무작위로 적힌 생각의 조각들을 모은다. 과거에 좋아했던 것들, 할 수 있었던 것들을 더듬어 본다. 그렇게 남은 것을 한데 모아 게으르되 최선을 다한 방식으로 엮어 본다.



여하늘, 남은 유령, 트레이싱지에 실크스크린, 가변 설치, 2023_1




여하늘, 남은 유령, 트레이싱지에 실크스크린, 가변 설치, 2023_2




여하늘, 매뉴얼 오브 레미, 싱글 채널 비디오, 4K, 06분 58초, 2023_1




여하늘, 매뉴얼 오브 레미, 싱글 채널 비디오, 4K, 06분 58초, 2023_2




여하늘, 매뉴얼 오브 레미, 싱글 채널 비디오, 4K, 06분 58초, 2023_3




여하늘, 필경 - 가자!, 드라이포인트, 에칭, 복합매체, 가변 설치, 2023




여하늘, 필경 - 빨간 책, 드라이포인트, 에칭, 복합매체, 가변 설치, 2023




여하늘, 필경 - 유령의 책, 드라이포인트, 에칭, 복합매체, 가변 설치, 2023




여하늘, 필경, 드라이포인트, 에칭, 복합매체, 가변 설치, 2023_1




전시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