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세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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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eh.yoo



삶은 알 수 없이 시작된다.  언제부터 존재하는지, 언제 바스러질지 명확하지 않다. 화분 안의 생물이 서로의 양분을 먹고 자라난다. 시든 생물의 양분은 새로이 자라는 생물을 구성하고, 시간이 흐르면 자라던 생물이 시들어 같은 과정을 반복한다. 그들은 서로의 생애를 공유한다. ‘나’라는 것은 어쩌면 내가 땅에 태어나 존재하기 전부터 시작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는 이전의 ‘나’로부터 연결이 끊어지고 기억을 잃은 존재일지도 모른다.



의료용으로 만들어진 실리콘 더미인형은 몸과 비슷한 듯 다르다. 색도, 질감도 몸과 비슷하게 만들어졌지만 사람의 것과 다른 묘한 감촉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핏기 없이 부은 몸, 말랑할지 딱딱할지 모르고, 그 온도도 알 수 없는 몸과 매우 닮았다. 이러한 유사 신체 물질이 형을 갖는 과정은 주로 액체를 틀에 부어 굳히는 캐스팅기법으로 이루어진다. 틀에 담아내고 비워내는 과정을 통해서, 틀 안에서 물컹하고 축축한 신체가 물려받아진다.

캐스팅 과정은 계속해서 앞서 사라진 존재를 불러낸다. 복제된 형상은 틀을, 틀은 복제되기 전의 원형을 상상하고 기억하게 한다. 자기를 복제한 틀과, 원형을 피부로 덧그리며 ‘잃어버린 기억’을 회복하는 것이다. 어쩌면 물려받았을지도 모르는 운명이나, 작은 습관이나 기질 같은 것들을. 그러나 복제 과정에서 발현되지 못하거나 새롭게 발현된 것, 일종의 오류와 차이가 발생한다. 작은 차이가 복제된 ‘나’의 정체를 복제되기 이전의 ‘나’와 다른 존재로 자각하게 한다.

하얀 수시포로 몸이 덮여질 때 물려받은 생애를 다시금 마주하게 되는 것 같이, 복제된 나와 이전의 나의 기억을 자극해 깨운다.




물려받은 몸



Incubating, 2023, 실리콘, 가변설치



자기복제기계 IV, 2023, 철, 망사천, 라텍스, 10 x 15 x 220cm



유령을 위한 틀의 틀, 2023, 유리, 가변설치



유령을 위한 틀의 틀, 2023, 유리, 가변설치



1/4 또는 그 이상,2023, 폴리우레탄, 실리콘, 철, 21 x 21 x 90cm



화분,자기복제기계 II



노란 덩어리,껍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