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연

@iyimo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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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트 위 댄스 메들리
Dance Medley on the Carpet


쉽게 무시되는 기의의 작은 차이들로 인해 실상 같은 얘기를 공유하지 못하는 것, 그래서 고립되는 것에 대한 막연한 공포가 있고 그것은 곧 내가 중력 없이 떠올라 부유하는 감각을 느끼게 한다. 언어 사용의 상황에서 비롯된 이격과 바닥이 없는듯한 느낌을 극복하기 위해, 위에서 내려다 본 바닥과 카페트를 캔버스 위에 반복적으로 구현한다.

평면에 계속적으로 접촉하는 것을 마치 카페트에 몸을 비비는 것과 같은 행위라고 말한다. 이는 언어화의 과정 없이 즉각적인 감각으로 몸 자체를 인식하는 기초적인 움직임이 된다. 불확실한 존재 이상의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은 어딘가에 직접 닿아있어야 한다는 물리적인 믿음을 가지게 하고, 떨어져야 다시 닿을 수 있기 때문에 끊임없이 닿음과 떨어짐을 반복하며 카페트에 문질러진다. 물질 세계와의 반복되는 접촉으로 그와 그 이외의 것들 사이의 구멍을 메꾸려는 사람은 캔버스에 닿고 떨어지며 흔적으로 남는다.

기호화되지 못한 몸의 움직임들은 세분화된 기의보다는, 그저 ‘행위한다’라는 단어로 크게 묶이는 애매한 상태로 여겨지는데, 이 특정되지 않은 신체의 움직임은 곧 몸을 해체한다. 그려진 몸의 모든 부분은 계속해서 어딘가와 맞닿고 쓸릴 수 있는, 촉각을 위한 매개이자 살덩어리로 존재한다. 살과 몸의 끝부분을 산발적으로 그려내어 기관 없는 신체*에 대한 표현 방식을 모색한다. 동시에 화면 위 이미지들의 모든 이야기를 지우고자 그 몸을 [도모]**라고 이름 붙인 필치로 흐려 반 정도 해체한다. 작업은 이미지에 변주를 가해, ‘무엇’이라고 이름 붙이는 선택을 유예하려 시도하고, 구어spoken language 이전의 시각적 경험을 그 자체로 두는 것을 목적으로 진행된다. 또한 등장하는 완벽하게 완결된 방의 이미지는 사실 그 틈이 전부 어긋난 채로 존재하고, 표정을 가진 별쿠션은 사면이 닫힌 방과 캔버스의 한 가운데에 자리잡고 모든 벽면에 닿아있으며, 공간을 점거한 듯 우두커니 서 있다.


여러 감각이 혼재된 상태더라도 그것은 여전히 공허하게 비어있는 화면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디에나 있는 바닥은 늘상 그 자리에 있기에 사라진다. 방 한가운데 있는 아무것도 비치지 않는 거울과 비워진 책의 페이지는 분명 있지만 보이지 않는 대상을 비추고, 꽉 채워진 도모는 결국 특정함을 잃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태로 남는다. 의미가 제거된 이미지에서 오히려 연상되는 무언가를 찾으려는 노력은 다시 기호성을 찾으려는 언어의 약속에 편입되어, 또 다른 이격이 생긴 이미지를 생산한다.


*기관 없는 신체는 ‘강렬도=0’의 상태를 말하는데 강렬도의 숫자가 올라간다는 것은 기관화되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기관 없는 신체는 욕망과 강렬도에 따라 앞으로 무엇이든지 될 수 있는 하나의 잠재적 장이다. -류한승, <유목주의 연구-들뢰즈와 가타리를 중심으로> 발췌

**[도모]는 작업에서 계속적으로 등장하는 파편같은 모양의 스트로크에 붙인 이름이다.



팥빙수 드로잉 2



별쿠션의 댄스메들리, 2023, 캔버스에 유채, 194.7x97cm




 발바닥, 2023, 캔버스에 유채, 162.2x97cm_ 꿈치, 2023, 캔버스에 유채, 162.2x97cm




초록 카페트, 2023, 아이소핑크, 겔미디엄, 유화전용지에 유채, 백자토에 백유약, 57x23x5cm




거울, 2023, 아사천에 유채, 150x95cm




별 성찰, 2023, 캔버스에 유채, 53x45.4cm




별쿠션 at Grønneviksøren, 2023, 캔버스에 유채, 65x45cm




별쿠션 옆 태극권 메들리_1부터 3, 2023, 캔버스에 유채130.3x80.3cm




매직 카펫 라이드, 2023, 캔버스에 유채145.5x89.4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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