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지수
neomuhae177@naver.com도착과 불시착 사이에서 이야기는 우발적으로 시작된다. 단일하게 보였던 경험은 중층의 말하기와 기억으로 멀찍이 산재한 채 은밀하게 공동의 것으로 부유한다. <어느 붉은 산실의 바깥에는>, <“종시終始”>는 공통적으로 누군가의 여행이 선행된다. 우회로에서 맞닥뜨리는 우연한 만남은 불투명한 깨달음으로 이어진다. 작업의 주된 취지는 그 불연속적인 발견과 만남을 짐작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2022년 여름, 통영
친구 한별이 마음 놓고 지낼 수 있는 거처가 통영에 있다고 했다. 그는 ‘정황적 공동체’라는 주제를 가지고 가정집에 머물며 작업하기 위해 그곳에 같이 가자고 제안했다. 공교롭게도 통영은 세습무가가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곳이었고, 우연히 남해안별신굿 축제에서 마주친 예능전수자 정영만 선생을 만났다. 그의 공연 후 그에게 인터뷰를 조심스럽게 요청했다. 그의 예능전수관으로 초대받아 과일봉지를 들고 방문했던 그날, 대화의 주제가 제의의 형이상학적 측면일 것이란 예상을 벗어나 그는 무속인으로서 훈련 받고 살아간 세월 동안 목도한 세상살이의 변천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얘기를 이어갔다. 그 이후, 방황하며 지나친 통영의 길목들에서 그가 전해준 과거가 소환되는 기분에 휩싸이는 것이었다.
파도가 뱃사람들을 이따금 데려갈 때, 무속은 아직 살아있는 자들을 위해 존재한다. 죽은 자나 살아있는 자나 공평히 그 안위를 물으며 매개자를 자처하는 것이 선생이 말하는 무속이다. 그중 우리가 알지 못했던 건 마을 사람들의 풍속에서도 무속이 긴밀한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가령, 병원으로 갈 수 없는 산모의 출산에 가담하여 산파가 되기도 했다는 것. 미끄덩한 태아를 배 속에서 건져올렸던 그의 기억. “안쪽의 배와 바깥쪽 다리의 온도가 다르니, 이 둘의 온도를 맞춰 줄 사람이 필요하다.” 그밖에 고립된 섬에서 다른 지역 간의 문화 교류와 전파에도 실질적인 역할을 담당했다는 것. 춤과 무악뿐 아니라 모든 생활사 전반에 대해서 무가는 낱낱이 알고 있어야만 했다.
그는 무속이 소외받고 탄압받았던, 그리고 지금까지도 일종의 미신으로 여겨지는 종교적 몰이해가 지배적인 지금의 상황과 이따금 공연예술인으로만 취급되는 전수자의 삶을 연결된 문제로 보았다. 대형교회의 세력이 우세해짐에 따라 제의의 장은 축소되었고, 그는 그 세태를 “부당한 풍요”라 일컬었다. 이 오래된 이야기는 여행의 시작점이었던 통영이라는 장소를 넘어선다. 증언의 아주 작은 부분들이 풍경의 모습을 근저에서 흔든다. 그 흐름에 올라타 우리는 이야기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는 어느 오래된 교회에서 몰래 주먹 춤을 추고, 바다가 보이는 가정집에서 아이를 밴 흉내를 내고, 탯줄을 만들어 마당에 늘어뜨리며 시간을 보냈다. 놀이와 의식의 중간 지점에서 우리는 일시적으로 이야기로 함께 모였다 일상으로 돌아왔다.
2023년, 헤이룽장
돌아가야 할 방향이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자신이 처한 지형을 인지하는 건 좌절되기 일쑤다.
홀몸으로 자유롭게 땅을 누빌 수 없어 세계를 이해할 수 없게 되자, 훗날 할머니라 불리는 여자는 아이를 낳아 길러 “너는 반드시 온전한 몸으로 이곳을 떠나거라” 일러뒀다. 자신의 모습이 돌이킬 수 없이 사라지게 되어도 모험을 감행하라며. 떠나온 곳이 어떤 모습인지, 여자에게 전해 받은 본래의 욕망까지도 망각한 아이는 껍데기만 남은 대물림된 이야기를 타지에서 나고 자란 자신의 아이에게 전한다.
중국 지린성, 랴오닝성을 비롯한, 영상에 나오는 헤이룽쟝성의 하얼빈, 무단쟝 두 도시는 동북,
“동베이”라 불린다. 100여 년 전, 가난과 핍박을 피해 조선의 이주자들이 이곳에 왔다. 이들은 수차례 명칭 변동을 겪는다. 제국의 식민으로서 2등 시민이란 오명을 벗어난지 몇 년 안되어, 새로운 국가 건설 이념을 수립한 중화인민공화국은 남겨진 조선 사람들에 대한 처분을 두고 고심한끝에 공민의 자격을 내어주는 대신 이들을 소수민족이라 칭하기에 이른다. 이윽고 들이닥친 토지 개혁과 문화대혁명으로 조선의 이주민들은 자신의 면모와 내면을 중국 인민의 모습으로 체화한다. ‘잃어버린 10년’1이 지나 개혁개방의 시대가 도래하고, 이후 냉전 종식의 조짐이라 할 수 있는 88올림픽이 열리고 난 얼마 후, 그들 중 일부가 다시 고국으로 귀환한다.
영상에서만큼은 투어리스트와 이국의 정착민이 동떨어진 인격체가 아닌 다중의 음성으로만 구분되는 동일한 하나의 주체가 되길 원했다. 사실 그것은 가능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시대를 거치면서 지형과 사건들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기억과 함께 같이 망각된다. 길거리에 지나가는 아이들, 학교 운동장에 삼삼오오 모인 소학교 학생들을 카메라에 꼭 담고 싶었던 이유는 그들의 모습이 망각 이후를 전망해 주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가족의 고향이었던 헤이룽장을 다니면서 망각의 도착지를 긍정하며 살아가는 것이 이곳의 현실이지 않을까 여겼다. 떠나온 사람들을 생각할 때. 배와 비행기를 거쳐 단숨에 신분은 말소되었지만, 그 대신 더 높은 곳에서 넓은 지형을 달리 볼 수 있게 되었다고 짐작하며.
<어느 붉은 산실의 바깥에는>, 단채널 비디오, 사운드, 9’, 2022
조한별 공동 작업
이야기는 통영의 한 무가의 말에서 시작되었다. “안쪽의 배와 바깥쪽 다리의 온도가 다르니, 이 둘의 온도를 맞춰 줄 사람이 필요하다.” 뱃속에서 시작된 안과 밖은 산파였던 젊은 무가의 기억을 넘어 제의와 세속, 전통과 근대라는 양분된 관념을 가로지른다. 대형 교회의 세력이 우세해짐에 따라, 긴 세월에 걸친 제의의 장은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마을 축제 공연의 한편으로 물러선다.제의의 변천사는 역할에 일시적으로 귀속되었다 일순간 해체되는 롤플레잉으로 재현된다. 정황적으로 한자리에 모인 다수가 하나의 염원으로 결속되어 제사를 치르고 난 후 다시 각자의 터전으로 돌아가는 제의의 과정처럼, 출연자들은 이야기의 흐름 안에서 자발적으로 다중의 역할을 체험한다.
<“종시2終始”>, 단채널 비디오, 사운드, 11’ 10”, 2023
중국 지린성, 랴오닝성을 비롯한, 영상에 나오는 헤이룽쟝성의 하얼빈, 무단쟝 두 도시는 동북, “동베이”라 불린다. 100여 년 전, 가난과 핍박을 피해 조선의 이주자들이 이곳에 왔다. 새로운 국가 건설 이념을 수립한 중화인민공화국은 남겨진 조선 사람들에 대한 처분을 두고 고심한 끝에 공민의 자격을 내어주는 대신 이들을 소수민족이라 칭하기에 이른다. 그들은 시대가 요구한 자기정화를 거듭하여 세대를 이룬다. 계승된 생존 방식은 어느덧 과거를 잠재한 채 여행자의 얼굴로 남는다. 신원을 보증하는 여권 사진을 찍는 여성의 얼굴은 누군가 타국에서 찍은 옛 가족사진과 오버랩된다. 관음적 시선으로 타지의 풍경을 바라보는 여행자, 시대를 거쳐 변모하기에 이르는 이주한 사람들의 외양과 기억. 양립할 수 없을 것 같은 둘은 여성 내레이터의 음성으로 하나 된다. 1988년, 냉전 종식의 서막을 알렸던 서울 올림픽 풍경 속 운동장을 가로지르는 아이의 이미지는 타국의 조선 사람의 아이와 대조되며, 동시에 닮아있다. 뿌리의식은 무익하지만, 아이는 국가라는 영토적 경계선을 횡단하는 하나의 조감도를 상상한다.
1십년 동란(중국어: 十年動亂), 중화인민공화국의 문화대혁명(1966년 ~ 1976년)을 "십년 동란"이나"중화인민공화국의 잃어버린 10년"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2명사. 마지막과 처음. 또는 마침과 시작함. 시인 윤동주의 산문 <종시>를 인용하였다.
임지수,“종시 終始”, 단채널 비디오, 사운드, 11’ 10”, 2023
임지수,어느 붉은 산실의 바깥에는, 단채널 비디오, 사운드, 9’, 2022_01
전시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