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아무래도 졸업 전시에 대한 비평을 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글을 거듭 고쳐 쓰면서도 계속 주저합니다. 리뷰나 비평의 위상을 가지는 글이니 그래도 일종의 경향성을 포착하기 위해 애를 써보겠지만, 비평가니 큐레이터니 쓸데없는 이름표를 달고서 전시에서 본 것들을 언어로 규정하려는 시도 자체가 이상하게 느껴집니다. 전시에 참여한 이들이 여기에 쏟아놓은 무언가가 일반적인 단체 전시와는 다르기 때문이겠죠. 그렇다고 축사나 응원의 편지 같은 글을 바칠 수도 없는 일입니다.


일단 전시의 제목부터 돌아봅니다. 많은 이들이 여러 날 모여 함께 지어 올렸을 그 제목에는 기호의 연쇄 뒤로 하나의 문장이 따라 붙습니다. 그 기호는 하나로 꿰어진 형태이면서 동시에 앞뒤로 열려 있어 연속적인 확장성을 가진 것처럼 보입니다. 부제라고 할 수 있는 뒤 문장과 함께 보면 그것은 매듭이 되지요. 문장에 쓰인 ‘손가락’을 통해서 가만히 묶여 있는 상태가 아니라, 계속 매듭을 지어내는 동사적인 행위도 감지됩니다. 그림과 글자를 서로 꿰어내는 이 제목은 기호가 항상 지니고 있는 미세한 틈새를 벌써 들춰내는 것 같습니다.


매듭과 손가락은 은유이지만, 구체적인 이미지이기도 합니다. 매듭은 길쭉한 물체를 교차해 구멍을 만들고, 구멍 안으로 다시 그 물체를 통과시켜 만들어집니다. 매끄럽고 자연스러운 한 방향의 흐름을 거슬러 이상하게 꼬여있고 유별나게 만져지는 어떤 감각적 덩어리이죠. 이것을 시간에 비유해 보면, 항상 앞으로 흐르는 시간을 잠시 꼬아 언제든 다시 더듬어볼 수 있도록 어떤 순간에 표시를 하는 일이 아닐까요. 한 명의 예술가의 인생에서는 졸업 전시라는 사건이 바로 그 매듭이 될 수도 있겠죠. 매듭은 그렇게 멈추어 더듬어볼 수 있는 특이한 순간이면서 동시에 구멍과 그 사이로 빠져나간 것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전시에서 발견했던 제각각의 아름다움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가장 먼저 언급해야 하는 것은, 전시라는 또 하나의 형식을 구축한 방식입니다. 각 전시 공간의 입구에는 예술가들의 이름보다도 더 크게 ‘비좁은 통로’, ‘어두움 주의’ 같은 아이콘이 붙어 있습니다. 솔직히 너무 조심스러운 것 아닌가 하는 마음도 들었지만, 관객의 다양성과 다채로운 감각적 차이에 대한 세심한 접근을 일부러 전면화하는 형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쉬운 정보 음성 안내 영상’을 제작한 것이나, 홍보물에서도 두드러지는 접근성 안내, 그리고 전시 현장 곳곳에 다양한 형식으로 반복되는 접근성 관련 문제는 허울뿐인 배리어프리가 되지 않기 위한 분투로 보였습니다. 아름다움이 탐구되는 플랫폼 자체의 세심함은 아름다움의 조건에 대해 생각하게 만듭니다. 적어도 이번 전시는 그 조건을 진지하게 고민하는 이들이 만들었다는 것은 분명했습니다.


전시된 작업들은 놀라운 형식적 완성도를 보이기도, 때로는 일부러 어긋나며 덜거덕거리는 소리를 내기도 합니다. 어딘가 야심 찬 구석이 있는 작업도, 너무 소박해 보이는 작업도 있었죠. 각 전시 공간에는 서로 너무도 다른 가지각색의 세계가 펼쳐졌습니다. 눈에 띄는 몇 가지 경향성 중에서 먼저 꺼내고 싶은 것은, 연약함에 대한 것입니다.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고 있는 얇은 나무 막대 같은 것들. 팽팽하게 당겨 묶지 않아 매듭이라기보단 꼬임 정도에 가까운 애매한 힘의 상태, 혹은 다 찢어진 종이 조각같이 망가져 보이는 상태, 얇아서 찢어질 것 같은 필름, 살갗, 라텍스, 유리막 등등. 물질성과 형태의 괴리에서 오는 끊어질 듯 연약한 힘은 역설적으로 너무도 강해서 아직도 생생한 감각으로 다가옵니다. 그런 감각적 심상을 전시 곳곳에서 마주할 수 있었습니다. 너무 얇거나 너무 약해서 혹은 너무 작아서 오히려 힘을 가지게 되는 문제를 생각합니다. 강하고 눈에 띄며 자연스럽게 환호성을 자아내는 것보다 약하고 스쳐 지나가기 쉬운 것이 어떻게 힘을 가질 수 있는지 탐구하는 이들은, 일찍이 기존 세계의 감각적 구성에 구멍을 내는 자신의 전략을 발견한 것처럼 보입니다.


또 하나의 경향성은 뚜렷하게 현실을 드러내는 것보다 현실이 무언가에 매개된 상태 그 자체를 다루는 문제입니다. 정치적인 사안을 다루면서도 현실과 가상을 이상하게 겹쳐 놓거나, 몽롱하게 뒤틀어내거나, 때로는 가장 진지하게 다루고 싶은 문제를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취급하거나, 너무도 명확한 정치적 사건을 저 뒤편에 깔린 풍경처럼 두는 전략이 곳곳에서 감지됩니다. 이것을 단순히 정치적인 것이 가볍고 쉽게 다루어지는 양상이라고 할 수만은 없을 것입니다. 정치적인 예술이 정치를 직접적으로 다루었을 때 오히려 비판적인 힘을 잃어버리는 역설을 부지불식간에 받아들인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 작업들은 예술적 매개에서 정치적 현실이라는 것의 위상 변화, 더 나아가 오늘날 리얼리즘의 어떤 양태를 고민하게 만듭니다.


개인적으로는 종교, 무당, 마녀, 그리고 사주 등으로 드러나는 소위 신비주의에 대한 입장들도 흥미로웠습니다. 오늘날 매체 환경에서 신비라는 문제가 어떻게 감각되는지, 웹 기반의 서브컬쳐와 신비주의적 주제들이 어떻게 겹쳐질 수 있는지 등등. 신성하거나 불경한 것, 신비롭고 비합리적인 것들이 여기저기 출몰하는 모습을 목격했습니다. 이른바 테크노 샤머니즘이라고 불리는 규정을 막 넘어서면서 무언가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극단적인 스케일을 부딪치는 전략도 언급할 필요가 있습니다. 거인과 인간이 교차하며 나타나고, 건축적 스케일과 조각적 스케일이 함께 놓이고, 하나의 이미지에서 극단적으로 좁은 시야와 풍경을 조망하는 시야가 겹치기도 합니다. 서로 다른 스케일을 충돌시키는 전략은 우리가 세계를 감각하는 방식이 결코 하나가 아니라, 항상 여러 감각적 체제가 겹쳐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하지요. 이 외에도 말로 다 담을 수 없는 다채롭고 아름다운 실천들이 그곳에 있었습니다. 물질과 씨름하면서, 혹은 물질에서 벗어나려는 불가능한 시도를 반복하면서, 유령을 쫓으면서, 혹은 내쫓으면서, 때로는 그냥 끊임없이 그림을 그리면서, 자신과 싸우고, 또 동료들을 비추면서.


그렇게 전시를 보고 나오니 손에 한가득 종이 쪼가리가 들려 있었습니다. 그것이 졸업 전시 관람의 묘미이기도 하지요. 규격도 제각각이라 계속 나풀거리는 종이를 손에 들고 걸으며 이상하게도 삐라를 떠올렸습니다. 그 종이 쪼가리에는 텍스트와 이미지, 그리고 운동이 이상하게 겹쳐있죠. 조르주 디디-위베르만은 관련하여 이렇게 씁니다.


“삐라는 나비처럼 겹친 한 쌍이기 때문에 효과적이다. 그것은 연약하지만 동시에 저항적이고, 시적이면서 전략적이다. 빛과 그림자, 행동과 제스처로 만들어져 있고, 절망 그리고 봉기라고 불리는 힘으로 가득하다. 그것은 그저 텍스트일 뿐인가? 그렇다. 삐라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그저 이미지일 뿐인가? 그렇다. 그것은 나비를 닮았고, 그렇기 때문에 나타났다 사라질 수 있다.”1


여기에서 다시 이번 전시의 제목으로 돌아가 고민을 이어갑니다. 매듭과 손가락 사이에서. 구멍과 구멍을 통과하는 것들 사이에서. 이미지와 텍스트 사이에서. 잘 묶여 있는 것과 빠져나가 버리는 것들 사이에서. 사로잡히는 것만큼이나 놓치는 것들의 소중함을 생각합니다. 이번 전시에 대한 기억도 그러겠지요. 잠시 열렸다 지금은 사라져 버린 전시는 소문으로, 지금 이 웹사이트로, 아니면 전시 공간 어딘가 지층처럼 남아있을 흠집이나 스티커 자국 같은 것으로만 남게 될 것입니다. 그래도 전시를 통해 만들어진 각자의 매듭은 언제고 다시 매만질 수 있는 나름의 표식이 되었겠죠. 그것이 꽉 묶여있든 헐렁하게 풀려있든 상관없이. 우연히 발견하거나 꺼내볼 때마다 다시 무언가 해나갈 힘이 되기를.


[1] 조르주 디디-위베르만, 「욕망들에 의하여」, 『봉기』(Uprisings) 전시 도록




글: 권태현




권태현은 전시를 기획하고 글을 쓴다. 예술계에서 활동하지만 쉽게 예술이라고 여겨지지 않는 것들에 항상 더 많은 관심을 가진다. 정치적인 것을 감각의 문제로 파악하는 관점에 무게를 두고 연구를 지속하고 있다. 《뒤, 따라》(평화박물관, 2021), 《flop: 규칙과 반칙의 변증법》(소마미술관, 2023), 《마테리델리아》(울산시립미술관, 2023) 등 전시를 기획했다. 또한 〈콜렉트, 콜렉티브, 콜렉션〉(서울시립미술관, 2020), 〈영구 소장〉(국립현대미술관, 2021), 〈인터-페이스-아나토미〉(코리아나미술관, 2023), 〈네오-메타-트랜스-〉(아르코미술관, 2024) 등 다양한 기관과 협업하여 큐레토리얼 프로젝트를 수행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