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의 비밀
“거기서는 어떤 일도 가능하지. 나 혼자 있는 방이니까.”
아직 부모의 집에 살고 있던 때였다. 당시 알고 지내던 이 중에는 나와 같은 처지에 있다가 이제 막 방 하나를 얻어 혼자 살게 된 사람이 있었다. 그가 자랑하듯 여러 말을 시작했다. 그의 작은 방에서는 어떤 일도 가능하다고 했다. 섹슈얼한 상상을 포함해서 그 어떤 일에는 제한이 없는 것처럼 여겨졌다. 사실이야 어떻든 확실한 것은, ‘자기만의 방’이 아주 사소하고 단조롭고 그래서 더 분명한 욕망에 연결돼 있었다는 점이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확인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그것이 자유의 감각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예술사 졸업전시는 짧은 기간 낡은 학교 건물에서 진행된다. 졸업생이자 참여 자들에게는 한 사람 당 하나의 방이 주어진다. (큰 방을 둘이 차지하는 경우에는 가상적/실제적 가벽으로 공간은 나뉜다.) 각자는 한시적으로 학교의 공간을 점유하고 분명한 자기 방을 가설하고, 잠깐 동안이지만 자기만의 것이 된 공간 안에서 어떤 일도 벌일 수 있다. 이름이 나붙은 방들이 늘어선 차가운 복도는 칸칸의 방 안에서 일어나는 소란을 애써 감춰 둘 뿐이다.
이번 졸업전시에서도 역시 ‘방’의 속성과 ‘전시’의 속성이 포개졌다. 특히, 온라인 포맷 없이 오프라인에서만 진행되는 전시라 그 물리적 조건이 더 강조됐다. 전년에 이어 베리어프리 동선 안내와 큰 글씨 서문이 제공되는 가운데, 방들은 저마다의 이야기를 소개하는 개별 전시 서문과 작품 리스트, 방명록을 가지고 있었다. 전시 기간 동안만 볼 수 있는 작품, 전시의 맥락 안에서만 회전하는 작품 등이 사건을 꾸리고, 사건은 그 자체 전시가 되었다.
나는 방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 각각의 전시에 다소 관음적인 관심을 갖고 문 안으로 들어섰다. 방의 주인은 습관, 취미, 취향, 강박, 트라우마를 공개하거나, 자신이 가장 좋아하거나 잘 하거나 궁금해하거나 그냥 자주 하던 무엇들을 펼쳐 놓았다. 나는 바닥 또는 책상 위에 놓인 것들, 벽에 붙은 것들에 다가가 몸을 굽혀 들여다보고, 앉거나 눕거나 많은 경우 일어서서 주어진 것을 보고 들었다(아쉽게도 실황 퍼포먼스는 보지 못했다).
점유하고 획득한 방은 오롯이 팬데믹의 시기를 겪은 졸업생들의 상황을 환기했다. 여럿이서 함께 쓰던 작업실은 폐쇄되었고, 이야기는 스크린 안을 떠돌았으며, 만남은 호흡과 냄새, 타액을 깨끗이 거른 상태에서 이루어졌다. 감탄도 실망도 타인의 얼굴 앞에 내뱉지는 못하던 시간을 지나면서, 각자는 이야기를 긴 글로 기록해 두려고 했을 것이고, 손에 쥐어지는 감각을 연습했을 것이고, 코와 입을 통해 숨 쉬어지는 통로의 감각을 잊지 않으려 노력했을 것이다. 꽤 긴 시간 허락되지 않았던 접촉, 물리적인 부딪힘을 기꺼이 환영하며 참여자들은 온라인 밖 실질적인 공간(만)을 점유했다.
주어진 방은 예술 대학의 졸업전시라는 특성상 제도의 위상학적 차원을 확인시키기도 한다. 참여자들에게는 앞과 뒤, 이전과 이후의 틈으로만 확인되는 ‘자리’에의 인식이 요청되며, 현장/미술계라는 이름의 제도에의 편입이 제안된다. 그렇지만 ‘자리 찾기(여기서 약간의 정신분석학적 뉘앙스를 확보하자)’는 거의 매번 실패한다. 하나의 제도에서 다른 제도로의 진입, 새로운 제도에서의 자리 찾기는 결코 매끄럽게 진행되지 않는다. 더욱이 각 제도에 적합한 언어를 체득하는 일은 쉬이 자유를 허용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자율의 편에서 시도될 수 있는 것들이 있을 뿐이다. (전혀 다른 곳으로의 출구를 찾는 일 역시 쉬운 것은 아니다. 역사적 아방가르디스트, 그리고 모더니스트들은 늘 출구를 찾아 헤맸다.)
이쯤에서 굳이 밝혀 두는 한 가지는, 방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크게 새로울 것이 없다는 사실이다. 졸업전시라는 이유로 기대되는 ‘새로움’이 있을 수 있다면, 이 시대의 숙명과도 같은 ‘새로울 수 없음’이 그에 대해 긴장을 일으킨다. 아주 미미한 경련의 수준으로 말이다. 하지만 새로울 수 없음이 비평적 결론을 막다른 곳에 이르게 하지는 않는다. 가능성은 새로울 수 없음에서 발아한다.
많은 것들이 반복된다. 근대기 이래 – 구조와 소외, 시공의 모듈화와 재생산이 인식된 이후로, 일상도 미술도 끊임없이 반복되어 왔다. 그러나 과거의 것이 다시 도래한다고 할 때, 도래한 그것이 이전과 정확히 같은 것은 아니다. 아니, 같을 수 없다. 오늘 이곳에서 이들은 ‘여전히’ 빛과 소리와 같은 원초적인 질료에 집중하고, 오감과 인식에 관한 역사적인 탐구를 지속하며, 그림은 무엇이고 조각은 무엇인지, 무빙/이미지란 무엇이고 움직임은 무엇인지 묻는다. 여전히 사라지지 않은 폭력에 대해, 언제나 있어왔지만 그렇게 여겨지지 않은 부조리에 관해 질문하며, 스크린을 배회화는 스펙터클의 유령을 다시 뒤쫓는다. (인상 차원에서는, 유리와 세라믹을 시도한 경우가 눈에 띄게 많아진 것이나, 영상/기록의 형식적 실험이 양적으로 둔화한 것, 개별 텍스트에서 특정한 담론의 영향을 찾아보기 어렵게 된 것, 인간 및 인간형태 중심적 관점이 줄어들고 그 반대가 늘어난 것 등을 추가로 언급할 수 있겠다.) 그러한 반복들 사이, 소멸에 기대고 있는 반짝임이 드러난다.
결국, 전시는 항상 순간의 시공을 점유하고 사라진다. 전시로서 존재했던 방은 “사이 그늘”을 잠시 마련했을 뿐이다. 그렇지만 각자의 방에서 영근 저마다의 비밀은 남는다. 그것이 물리적인 오브제와는 또 다른 종류의 것이라도 괜찮을 것 같다. 자기만의 방을 위해 힘쓴 경험과 기억 위로, 지난 날 방을 끝내 얻지도 지키지도 못했던 사람들과 그들의 역사와 다시 방을 획득했던 사람들과 또 그들의 역사가 겹쳐진다.
허호정
글을 쓰고 전시를 만든다. 『한시간총서 06: 동물성의 잔상』(미디어버스, 2020)을 썼고, 전시 《동물성루프》(공-원, 2019)를 공동 기획했다. 그 외 《캐스트CAST》(d/p, 2021), 《House On Glabella》(뮤지엄헤드, 2021), 《말괄량이 길들이기》(뮤지엄헤드, 2022) 등 전시를 기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