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으로 탈출하기
“ 나무가 보고 싶다면 그냥 야외로 나가면 되지 않나요? ”
K 씨에게 물었다. K 씨는 놀란 표정으로 답했다.
“ 저는 집을 나설 때 나무를 보고 싶다고 말했죠 ”
생각이 실종된 어느 날, 베르톨트 브레히트
이여로
“ 나무가 보고 싶다면 그냥 야외로 나가면 되지 않나요? ”
K 씨에게 물었다. K 씨는 놀란 표정으로 답했다.
“ 저는 집을 나설 때 나무를 보고 싶다고 말했죠 ”
생각이 실종된 어느 날, 베르톨트 브레히트
멀리서 보이던 숲이 들어서면 보이지 않는단 사실이, 달이 나를 쫓아 온다는 말처럼 신기하던 때가 있었다. 숲을 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그런데 밖으로 나가지 않고서. 졸업 전시라는 특수한 형태는 복수의 관찰들을 묶어 내는 통합적 관점을 스스로 제시하지 않고, 특정한 ‘작품’이나 ‘작가’의 개별성을 선별할 수도 없다. 교육을 주관한 한예종의 특이성을 어설프게 언급하거나 전시 기획이 제공하는 ‘수관기피 현상(Crown Shyness)’을 키워드로 환원한다면 정보들의 중앙처리기관을 가리키는 진술적 자기반복에 빠질 것 같다. 그러니 ‘크라운 샤이니스’라는 자기지시의 형상을 끝까지 이용하기 위해서 1) 숲에 들어서고 2) 고개를 내리지 않은 채, 전시라는 내부를 거닐며 지각 또는 상상한 형상의 기술해보고자 한다.
들어가며
교육으로서의 미술 제도 내에서, 개체는 대상 영역의 특수성과 역사성을 익힐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누군가는 이것을 의도적이거나 의도적이지 않게 거의 익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제도와 맺게 된 회의와 부정이 그 계기이자 결과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그 질문을 번역해보면 다음과 같다. 제도는 자기 방어, 자기 분석의 수단을 자신의 개체들에게 동시에 제공하는가? 혹은 제도는 개체의 특수성을 희생시키고 환원하는 법만을 제공하는가? 강세윤은 이러한 생각 자체가 “자기 과몰입의 산물이고 허상”이라고 말하지만, 이는 제도가 자기 자신을 또 다른 환경으로 표상시킨다는 특징에서 자연스럽게 비롯되는 듯하다. 그러니까 누군가는 이러한 제도 바깥으로(비유하자면 숲 밖으로) 나가버린 듯했고, 제도와 성공적으로 동기화하더라도 제도가 가진 역사적 선형성 위에서 각자가 어느 위치에 있는지, 혹은 있으려고 하는지는 또한 극단적으로 다르다.
[그림1]
제도들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도식화할 수 있을까? 이러한 시각적 형상을 지리적으로(즉 그 형상의 외연 자체가 곧 그것이 품을 수 있는 성질의 전체인 냥) 읽어야 할까? 우선은 이것이 ‘설명’이라기보다 ‘최소한 설명이 필요한 무언가가 있음’을 의미한다고 약한 의미에서 생각해보자.
지금 제도와 개체라는 말은 불분명한 복합물을 의미한다. 복합물이 단일한 실체로 인지되며 발생하는 불분명함은 혼종성을 허용하며 커뮤니케이션의 계기가 되기도 하지만 그것이 반응-역반응에서 멈출 때에 다시금 처음의 전제로 돌아오게 된다. 가령 일군의 작가들이 끌고 들어온 일본의 ‘오타쿠’나 인터넷의 ‘밈’과 같은 하위문화, 혹은 더 단순하게 ‘문화 현상’이나 더 포괄적으로 ‘시각 문화’라고 일컬어지는 것들이 표상하는 단편적인 현상성은 동시에 특정한 제도를 함축하고 있다. 시각예술가는 이것을 관찰하거나 감지한다(혹은 그래야 하는가? 그래야 한다면 태도와 같은 주체적, 규범적 차원이 아니라 이론적 차원에서 ‘그럴 수가’ 있는가? 그럴 수 있다면 ‘작가’라는 범주를 이용해서 그럴 수 있는가?) 그것은 관찰자의 지각 시스템과 어떠한 하부 시스템을 공유하기에 지각의 대상으로 표상될 수 있을 것이다. 그 표상은 탁본을 뜨듯이 단편적으로 드러날 테지만, (그것이 디지털이나 오타쿠 같은 문화의 객체적-관념적 지시물이건, 각자가 천착하는 어떤 정서, 사물, 기술에 관한 페티쉬이건) 배후의 어떤 제도를 상상해볼 수 있다. 배후에? 이러한 시각 제도가 ‘그릴 수 있게’ 만드는 것들은 어떤 다른 것을 지시할까? 여하간 우리는 현상의 복잡성을 인정하기 위해 제도라는 말을 사용해볼 수 있고, 현상의 원인을 현상 자체에(그러나 단순함을 지칭하는 ‘그 자체’가 아니라) 귀속시킬 수 있게 된다. 복잡성을 전제로 하는 동어반복은 아직 활성화되지 않은, 아마도 그것을 그려냄으로써 도달할 그 현상의 어떤 지평을 상상하게 만든다. 복잡성을 귀속시키는 범주로 ‘제도’라는 어휘를 사용하는 이유는, 그 지평이 다시금 독자적 실체나 자율성의 신화로 환수되지 않게끔 하기 위해서이다.
그렇다면 관찰의 대상으로 상정한 것의 복잡성을 삭제했을 때에, 그 진술은 관찰이 준거하는 제도의 고유값을 양적으로 증대시키지만 그것을 노출시키지 않으며 곧 작동시키지 않는다. 가령 디지털에 대하여 말하는 경우 그것의 시각성이 ‘즉각적으로’ 디지털적인 어떤 것을 표상하지만, 그것을 통해 말하거나 그것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디지털과 무관할 수 있다. 반대로(그러나 같은 결과로) 관찰 도구의 복잡성을 삭제하고서, 관찰함으로써 발생하는 변형을 대상이 속한 체계에 따라 억제하는 경우 또한 숲 바깥으로 나가버린 것이라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니까 붓질을 한다고 그것이 ‘회화’를 작동시킨다고 말할 수는 없는데(물론 그것은 또 다른 무언가를 작동시킬 것이다), 한지원의 작업은 관찰 대상의 복잡성, 관찰 도구의 복잡성을 모두 보존한 채로 이루어진 것처럼 보인다. 해석을 요구하는 현상 앞에서의 반응이 대체로 기표적 차원의 차이에 주목한 뒤에 그 차이를 대상 자체로 귀속시킴으로써(복잡성의 삭제) 그것이 곧장 어떤 함축적이고 2차적 차이까지 갖고 있다는 식으로 비약하는데 반해(그림1에서 언급한 지리적 이해), 한지원은 유사성에 주목한 뒤에 둘 간의 차이를 ‘거리 특정성 가변성’으로 전개하고, 여기서 고정으로 귀속되는 운동(붓질)이 어떻게 “최소 단위의 실패”가 되며 “거듭되는 패배 선언”이 된다고 통보한다.
이러한 복잡성 환원을 설명하기 위해, 베르크하우스는 ‘하이에나는 하이에나가 아닐 수는 없다, 그러나 하이에나는 동시에 문다!’고 말했다. 이 턱아귀의 힘을 생각하면 강세윤이 말한 미술하기의 가해성, 혹은 ‘조각’ 뒤에 붙는 ‘-하기’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던 임다울의 말을 떠올리게 된다. 자기 자신에 준거하기 위해서는 우선 대상이 어디에 있는지 지각해야 자기 특정성을 가질 수 있고, 그렇게 “신체는 자신을 일종의 감각적으로 자각 가능한 형태로 경험할 수 있어야만 결정을 내리거나 구별해낼 수 있다”는 유아 심리학의 전제에 따르면 미술-하기의 난반사는 방향성을 외적으로 예측하기 어려운 유아기의 기어가는 움직임과 겹쳐 보인다. 그리고 강세윤이 “보이는 일을 막을 수 없다”고 말한 것처럼, 환원 자체에 대한 거부는 순수함의 물신으로만 가능할 것 같은데, 침해받지 않고, 개입되지 않는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혹은 그렇게 존재하고 싶다는 의도를 상정해서만 말이다. 그런데 그 물신을 적극적으로 이용할 수는 없을까.
제도와 제도라는 항을 설정할 때의 맹점을 수행자라고 할 수 있을까? 지금 ‘나’는 바깥에 나와 있기에 이를 수행자라고 지시할 수 있지만, 이 글에서 전제한 대로 숲 밖을 벗어나지 않으려면 그것은 또 다른 제도로 이해되어야 한다. 자아-주관-특수와 세계-객관-보편이라는 미리 구별되고 확립된 항들은 무엇이 물신이며 무엇이 언어임을 정해주지만 그것들 자신을 작동시키는 요소들에 대해서 말하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 자아를 개별적인 것으로 여기지 않고, 또 미술이라는 환경의 복잡성에 의탁하지도 않고(물론 그것은 복잡성이라는 관념으로부터의 몫을 얻을 것이다), 자아를 제도로 간주해서 연결시킨다는 것은 어떠한 기획일까? 이 글이 배제해 온 ‘나’라는 주어를 사용해보자.
나는 제도를 거친다. 그것은 나라는 범주가 제도라는 외부를 통과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 이미 상이한 제도들의 하부 시스템으로서 그것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제도들이 나의 환경인 바로 그만큼 나 또한 제도들의 조건으로 존재하며, 대뇌(인격적 지시체로서의 ‘나’)의 직접 지배를 받지 않는 무수한 자율신경계(제도들)의 연합이 나를 지탱한다. 김성연이 보이지 않는 살갗을 옷으로 보이게 한 것처럼, 이 자율신경계들은 외부와 연결되어 있다.
스테이트먼트 작성을 통해 만들어지는 이론적 자의식이 내/외부의 위치를 지속적으로 환기하는 역할을 맡는다면, 자의식 없는 자기 지시성이라는 모순된 형용을 통해 관점들을 겹쳐 보고 싶다. 그때 ‘나’는 폐쇄적이면서 개방적이라는 모순된 생산의 구조를 최소 단위에서 구현한다고 말이다. 길하은은 자신이 만든 세계관을 100종에 가까운 기성 캐릭터를 빗대 패러디(라기보다 투입)하고, 애니메이션과 영화 포스터, 누군가는 당대의 회고적, 퇴행적 경향으로 지시할 로파이 백그라운드뮤직의 백그라운드일러스트를 자신의 세계에 ‘그냥’ 가져와도 아무렇지 않다. 지시하는 상관물의 자리에 직접 겹침으로써 그것을 자기 준거로 여기는 작업들의 산출물이 주는 양적 규모는 어떤 압도의 경험을 유발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자기생산성을 가진 제도임을 암시한다. 길하은이 즐겨 사용한 지브리의 세계관을 빌면, 그것은 움직이는 성처럼 보인다. 그러니까 더 이상 의도에 대하여 말할 수 없고 목적에 대하여 말할 수 없으며 어떤 성향에 대해서 말하게 되는데, 이 성향은 앞서 언급한 제도의 지배적 성향과 즉각적으로 일치하지 않는데도 여전히 그 내부에 (한편으로는) 속해있다. 개체는 제도의 내부에 머무는데도(제도와 제도의 공집합) 마치 자신이 그 내부에 없는 것처럼(즉 지금 이 문장의 괄호 밖에서 ‘제도’라고 유일화해서 부르는 관찰 준거의 여집합), 자기 손에 필요한 것만을 거기에서 쥐어오는 것처럼 보인다. 이렇게 말해보자. 자아라고 불리는 하나의 준거는 제도의 관점으로 들어서면 보이지 않게 될지라도, 상이한 제도들을 겹쳐 놓는 공통적인 하부 시스템으로, 하부 시스템들 간의 비교를 가능케 하면서 자기 자신을 제도로서 느닷없이 출현시킨다. 즉, 탈출해 진입하는 곳이 내부라는 사실은 자아가 언제나 하위 단위로 존재하면서도 시스템 전체를 활용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정보가 거부된다면 사람들은 “왜요?”라고 묻는다. 정보는 외부적인 것으로, 혹은 중립적인 것으로 존재한다. 이러한 존재 방식을 가진 것만이 정보로 이해된다. 창작이 정보와 맺는 관계는 자기 자신에 대한 역참조를 일반적으로 허용하지 않는 학술적 방법론과 구분될 것이다. 여기서 시각적인 것은 무엇에 대한 직접적 언술은 아니다. 그리고 시각적인 것으로 우리에게 표상되는 것 또한 그것 자신의 구성요소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가령 이상희가 “거대한 시공간 속에서 고래가 올라올 때마다 고래들이 세계와 맺고 있는 관계들이 나타난다”고 말한 것처럼 그것은 나타나지만 동시에 자신을 등장시킨 시공간의 입지에 관한 정보는 말소한다(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고래에 관한 박물지를 저술하면 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왜요?”라고 묻게 된다. 시각성이란 정보가 필요로 하지 않는, 필요로 하는 줄 모르는 것들을 “이기적”으로 나타낸다. 그것이 “이타적”으로 보일 때마저도 전혀 상관 없는 것들을 동시에 형상화한다.
이상희의 작업이 직접 그 관계를 “감지”하려는 시도라면, 이다은이 “쓰레기 정보”를 투입하여 지켜보는 신경망 기계번역에서는 또 다른 방식으로 관찰자의 위상이 기능한다. 여기서 문자 언어와 시각 언어가 준거하는 (“기획된 인상을 주는 이미지”라고 말한 것처럼) 지배적인 유통 방식은 서로 겹쳐있다. 문자 언어에서 발생하는 균열들(문장과 문장 사이의 어색한 개연성, 입력이라는 시간적 배치에 따라 수정되는 번역문, 도착 언어의 반복되는 자리 교체)을 시각적인 것이 보완한다. 그럼으로써 ‘왜요?’라는 물음은 억제되며, 문자의 내용값 또한 도덕성의 표준 범위에서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즉 즉각적으로 ‘이상하게’ 돌출되지 않는다). 앞서 고유값을 증가시킬 “뿐”이라고 말했지만, 스테이트먼트를 통해 제시되는 관찰 위치 자체의 노출이 이 ‘증가’를 다른 층위로 데려간다. “민혜인, 이토명, 한봄”, “김해영, 김현진”이 공동 전시를 기획한 것처럼 작품을 내보이는 형식, 그것을 논평하는 담론, 연출하는 제도 등의 요소가 의미화의 요인이라면, 관찰자 역시 구분을 기입시키는 형식일 것이다.
이와 달리 임도연의 조각은 분명하게 “직시적”이다. 그것은 “현전의 고유한 영역”이 있다는 것처럼 존재하며, 지시하는 관념과도 일치함으로써 다른 독해를 유도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중단은 그 관념(여성[성])이 유통되는 통상적인 방식, 제시될 수 있는 다른 의미 있는 지각의 준거들을 중단시킬 정도의 경험이라는 점에서 관념적 독재와는 또다른 층위에서 독재적이다. 앞서 언급하였듯 ‘의미화’의 요인이 다층적으로 인식되는 미술장에서 이러한 시각성의 독재는, 언뜻 특수성이 희생될 수 있는 개방성의 상황에서 통제를 희생하지 않고도 의미화의 수준을 유지할 수 있다는 증거, 분화의 가능성처럼 보인다.
나가며
너무 이른 나섬인 것 같다. 이 글은 21회 한예종 조형예술과 졸업전시에 의하여 쓰였지만 동시에 개별 작품을 언급하지 않고자 했다. 결과적으로 그러지 못했지만, 이미 각자가 자신이 준거한 미디어와 매체, 기술과 관심 등에 관한 구체적 형식을 갖춘 채 내/외부에 대한 고민을 체계적으로 하고 있었고 그것의 실행이 존재했다. 이들의 작업이 자기와 타자의 ‘경계를 순간순간 조정하는 것’(*이휘웅)이라면, 의도하건 의도하지 않건 작업이란 곧 체계에 대한 비평으로서 최대한의 것들을 순간순간 끌어내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글에서 많은 작업들을 언급하지 못한 이유는 거기에 개입할만한 구분이 내게 없거나, 그것을 만들고 진술할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글은 창작이라는 행위 자체를 행위 일반의 역학으로 다소 환원해서 생각했고(즉 특수한 것을 일반화했으며), 개체나 제도 같은 말들은 그것들의 작동 속에서 다시 기술하려고 했다(즉 일반화된 지각의 범주들은 특수화하려고 했다).
리뷰라는 글쓰기 형식은 익숙한 반복일 수 있다. 이 글에서도 별로 새로울 것은 없겠지만 “비정보적이라는 비난으로부터 시작한다면 근본적인 의미에서 우리가 예술에 대해 말할 것이나 예술을 통해 말할 것은 없으리라”는 생각을 염두에 두고 글쓰기를 감수했다. 그런 의미에서 복잡성을 삭제했다거나, 숲 밖으로 나갔다는 등등의 말들 또한 부정적 규범으로 제시되지 않는다. 만약 그렇다면 이 글은 이 글 자신이 제시하고자 하는 유일한 가치인 형식적 개방성을 위반한다. 결함처럼 언급한 것들, 복잡성이 삭제된 결과물 자체는 또 다른 복잡성의 대상으로 간주된다면 끊임없이 생산의 과정 속으로 다시 환수될 것이다.
창작자들이 마주할 당면한 ‘제도적’ 문제는 어쩌면 각종 재단과 관에서 주관하는 프로젝트형 지원사업, 고등교육 체계로의 편입, 미술 시장 등과 같은 물리적 제도와의 역학일 것이다. 이에 관한 고찰도 위와 같은 이유에서 적지 못 했다. 다만 당연해 보이는 전제들, 가령 “창작자”는 “동시대의 감각적 질서”를 포착하며 “미술은 사회를 이해하게끔 한다”는 식의 입장과 시민적 교양의 문제이 어떻게 물적 구조들과 결부되어 있고, 변화하는 사회경제적 여건 속에서 점차 ‘비합리적’이 되어감에도 여전히 정전이나 걸작과 같은 관념에 기반하는 예술장의 사변적 준거들이야말로 내가 지켜보고 싶은 것들인데, 이 글의 용어법과 한 줄의 형식이라도 누군가 (이 문장 자체를 포함하여) 적절치 않은 자의적 진술들을 거부하는데 이용하게 된다면, 그것이 최대한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마지막에 약간의 감상이 허락된다면, 지금 쓰는 결말은 글 전체의 서문이 되어야 마땅했음에도 작업을 마친 뒤에야 쓸 수 있게 됐다는 역설을 ‘졸업자’들과 나누고 싶다. 지속하는 움직임 속에서 그 행위의 본질을 다시 파악하는 재귀성, 이 글이 그것을 형식으로서 공유하기를 바란다.
참고문헌
니클라스 루만, 신현진 외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