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 쓰기 연습
윤원화
안녕하세요. 전시가 끝나고 글을 씁니다. 편지처럼 시작하는 것은 전시가 어떤 면에서 편지 쓰기 연습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전시가 편지가 되었다는 말은 아닙니다. 편지는 다른 사람을 향하는 매체지만 전시는, 특히 졸업 전시는 누구보다도 작가 스스로 자기가 만든 것을 마주하고 그것을 통해 다른 사람을 만나는 자리니까요. 내가 만든 것이 나에게서 떨어져 나오면서 그 사이로 다른 사람들이 들어 옵니다. 또는 한때 나의 일부였던 것이 다른 사람처럼 낯설게 나를 마주 보고 있습니다. 전시는 그런 여지를 개방합니다. 그럼에도 전시가 편지 되기를 상상해야 했다면 그건 아마도 미술을 위한 공간이 있고 거기에 미술을 펼쳐 놓으면 다른 사람들이 와서 본다는 그런 당연한 일이 더 이상 당연하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미술은 어떻게 다른 사람들의 곁으로 다가갈 수 있을까요? 전시는 그런 질문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론 사람들이 여기까지 자기를 보러 와 주길 바랍니다. 직접 와 보지 않으면 모를 것들, 편지 봉투에 들어가지 않을 것들을 잔뜩 준비해 놓고, 전시는 손님을 기다립니다.
어떻게 이것을 저기로, 또는 저것을 여기로 옮길 수 있을까 하는 운송의 문제는 잠시 접어 둡시다. 그래서 우리가 한 자리에 모였다면, 그 다음에는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사람들이 미술의 집에 찾아와서 그 곁을 맴도는 상황에 관해서는 많은 사례 연구들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미술이 다른 사람들의 집을 방문하는 상황에 관해서는 알려진 바가 많지 않습니다. 우리 집에서 우리가 곁에 두는 것들을 생각해 봅시다. 우리 집은 우리가 생활하는 장소이고, 거기 있는 대부분의 것은 생활의 도구 아니면 배경입니다. 여러분은 평소에 몇 개의 채널을 열어 두고 생활하나요? 음악을 틀거나 유튜브를 켜 놓고, 인스타그램을 스크롤하고, 게임 창을 열었다가 닫고, 간혹 채팅 창과 줌 화면을 번갈아 흘끗거리고, 스케치북에 뭔가 끄적거리고, 만화책을 보다가 시집을 읽습니다. 그 사이에서 미술은 무엇이 될 수 있을까요? 실용적인 도구가 되긴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생활의 배경이 될 수 있을까요? 제 책장에는 작품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작은 것들, 전시 과정에서 나온 부스러기 같은 것들을 모아둔 선반이 있습니다. 그것들은 지난 시간의 기념품입니다. 제대로 된 작품을 들이는 것은 동거인을 맞이하는 것과 같아서, 그럴 여유가 있는지 먼저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 집이 갑자기 커지는 일은 없을 테니까 아직까지는 미술의 집에 손님으로 방문하는 편이 저는 더 좋습니다.
하지만 미술은 우리 집에 자주 드나드는 손님입니다. 전시 도록, 뉴스레터, 잡지, 그 외 온갖 기록물의 형태로 미술이 배달됩니다. 이건 저 자신이 전시 기록물을 만드는 일에 종사하고 있기 때문에, 미술이 업무 자료로서 들이닥치는 것이니까요. 일반적인 관객의 조건은 아닙니다. 그러나 작품과 기록물, 컬렉션과 아카이브, 물리적 실체와 그것을 재현하는 디지털 문서의 구별이 흐려지는 상황에서 미술이 우편물 형태로 움직이는 일은 계속 늘어날 것입니다. 수많은 푸시 알림과 메시지 사이에서 미술은 어떤 인사를 건네야 할까요? 우리는 어떤 기대감을 주고 무슨 효용감을 약속할 수 있을까요? 모든 것이 데이터의 순환과 축적에 합류해서 더 많은 곳에 퍼져 나가려고 애쓰는 화면 앞에서 너무 오래 머물다 보면 문득 길바닥에 나앉은 것 같아서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집니다. 그것은 시대착오적인 향수일까요?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는 모두 작은 방송국이자 거기서 발송되는 데이터 패킷으로서 서로를 식별합니다. 우리는 우편물을 만들고 우편물이 됩니다. 그 구불구불한 궤적들이 겹쳐져서 공간을 이루고 사물로 응축되고 다시 그것을 깨뜨리는 사건을 발생시킵니다. 전시가 그런 운동을 실험하고 반추하는 장소라면, 그것은 조금 더 넓게 정의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전시는 기록물의 형태로 지속될 수도, 온전히 마무리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단지 열리거나 닫히는 것이 아니라 고유한 생애주기를 가지고 이주하고 잠복하고 변이합니다. 이 글은 전시를 닫는 것이 아니라 전시가 남기는 작은 발자국, 또는 전시에 덧붙여지는 한 짝의 발입니다. 제가 이 작은 지면에서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전시에 발이 달린다는 것, 그래서 때로는 수백 년 지난 전시가 새 발을 달고 우리 집을 찾아오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전시의 시간이 정말로 어떻게 끝나는가는 아무도 단언할 수 없습니다. 수신인의 이름이 비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본 적 없는 것들을 불러들이는 초대장을 쓸 수 있습니다. 이 글은 그런 편지 쓰기 연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