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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다음의 아
 
 각자가 상상하는 공동체의 경계가 다를 때, 우리는 어떻게 ‘ 우리 ’가 될 수 있을까.

 이번 졸업 전시는 위 질문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그리고 학교라는 공동의 장소에서 같은 날 그려보는 우리의 교차점이자, 복수의 시간성으로부터 미지의 공동체를 그려볼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이러한 점에서 ⎨아 다음의 아⎬는 단순히 졸업생 개인들의 작업을 전시의 형태로 보여주는 것을 넘어, 각자가 미세한 세계를 구축하기 위한 움직임을 공유한다. 이 움직임을 통해 우리는 나의 말과 너의 말이 각자 다른 방식으로 겹치는 그 순간을 주목한다. 또한 다른 시간, 다른 장소에서 겹칠 수 있는 이후의 날을 포용한다. 통상적으로 ‘ 우리 ’는 학교와 같은 특정 장소에서 비슷한 시간대에 머무르는 이들이다. 혹은 스크린 너머로 같은 사건을 듣거나 보는 상태로부터 비롯된다. 하지만 때로는 서로가 다른 시간대에 다른 것을 보고 있음에도, 어느 순간 포개어지며 ‘ 우리 ’가 되기도 한다. 늦여름의 햇빛과 선명한 겨울 한낮의 햇살이 겹쳐지고, 낮에 스치듯이 들은 노랫말이 어느 밤의 섬세한 자장가가 되는 순간들. 이 순간들은 선형적인 시간이 아니며 인과적으로 배치되는 것과 무관하다. 오히려 그 인과적인 시간을 벗어나기 때문에 각자에게 소중한 시간의 밀도가 된다. 우리는 이로부터 함께 있지 않더라도 함께 있을 수 있으며, 복수적인 시간성으로부터 무수히 많은 시작과 끝을 그려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팔락슈 Pallaksch는 독일 시인 횔덜린이 말년에 자주 사용한 단어이다. 그는 이 단어를 때로는 ‘ 예 ’의 의미로, 때로는 ‘ 아니요 ’의 의미로 사용했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은 그가 “ 팔락슈 ”라고 말했을 때, 앞뒤 맥락을 신중히 살펴야만 그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렇게 횔덜린이 사용한 ‘ 팔락슈 ’는 그 자체로 불확정성을 담고 있다. 작은 차이에 따라 긍정도, 부정도 아닌 무언가로 작동하는 단어가 되기 때문이다. 이후 시인 파울 첼란은 횔덜린을 찬미하며 쓴 시 「튀빙겐, 일월」 1 에서 이 단어를 두 반복하여 시의 마지막 구절을 완성한다. 뿐만 아니라 시 속에서 그는 “ 또한 또한 ”, “ 항상 항상 ”과 같은 표현을 반복하며, 두 개의 눈으로 상을 바라보는 것처럼 단어를 겹쳐 쓴다. 이를 통해 첼란은 ‘ 듣는 두 눈 ’ 혹은 ‘ 말하는 두 눈 ’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이는 같은 것을 함께 보지 않더라도 서로 감각을 공유할 수 있음을 암시한다.

 마찬가지로 이번 전시 ⎨아 다음의 아⎬에서 ‘ 아 ’는 모음의 첫 소리로, 단어의 시작점이자 의미가 없는 소리로서 불확정성을 지닌다. 그러나 이 불확정성은 그 상태로만 머무르지 않고, 그다음에 이어질 반응을 통해 친숙한 언어나 그 자체로 작동하는 언어로 변모한다. 이는 횔덜린의 ‘ 팔락슈 ’가 시간과 공간을 넘어 파울 첼란의 ‘ 팔락슈 팔락슈 ’로 소환되는 과정과 닮았다. 이처럼, 전시에서는 원인과 결과의 명확한 연결이 없다. 같은 것을 같다고 쉽게 긍정하거나, 다른 것을 다르다고 단정짓는 것도 불가능하다. 우리는 그저 불확정성 속에서 발생하는 소리들이 포개어지는 순간을 마주하고, 언제든 겹쳐질 수 있는 우리의 가능성을 발견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