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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공간
▶︎ 이한범



겨울 동안 빈 공간에 대해 생각하면서 지냈다. ‘빈 공간’이 잘못된 표현이라는 걸 알게 된 건 최근의 일이다. 이 단어를 한국어 맞춤법 검사기에 입력하면 ‘공간’으로 대치하기를 권고한다. ‘공간’의 ‘공(空)’이 이미 ‘빈’ 이라는 뜻을 가졌으니 겹말 오류라는 것이다. 죽은 시체, 내면 속, 명당 터… 이런 표현들이 모두 겹말 오류에 해당하는 것이니 유의하라고 까지 친절하게 알려준다. 나는 며칠 곰곰이 생각해 보다가, 쓰고 있던 원고에서 ‘빈 공간’을 ‘공간’으로 고치지 않고 그대로 놔두었다. 문법적으로 틀렸다는 말에는 이견이 없다. 하지만 ‘빈’을 빼 버리고 나면, ‘공간’이라고만 남겨 두면 아무리 오래 지켜보고 있어도 그 단어에서는 도무지 공허가 일어나지 않았다. 내가 살고 있는 지금 세계에서 ‘공간’이라는 단어는 대개 비어 있는 곳을 지칭하는 데 쓰이지 않는다. ‘공간’이라는 곳에는 사람이든 사물이든 뭔가가 가득 차 있고, 구조가 버티고 있다.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구조가 버티고 있고 사물이 들어차 있어야만 비로소 공간으로 인식하는 듯하다. 비어 있다는 건 우리에게 너무 큰 불안을 주는 걸까? 아니면 자리를 비워둔 채 놔두는 건 요즘 같아서는 멍청한 일일까? 여하간 ‘공간’ 앞에 굳이 ‘빈’을 남겨 붙여 써야만 한다는 게… 어쩐지 공간이란 건 이제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어서 뭐가 됐든 굳이 노력 같은 걸 해야만 겨우 더듬어볼 수 있는 것이 되었다는 뜻 같기도 했다.

몇 년 전 아이슬란드에 머물렀을 때 무작정 케이히르라 불리는 산을 향해 간 적이 있었다. 바다처럼 펼쳐진 용암지대를 걸어가 마침내 꼭대기에 올랐을 때 나는 비로소 적막이란 무엇인지 처음으로 알게 됐다. 적막은 고요하지 않다. 흐름은 매섭고 매서운 휘몰아침은 여러 방향이며 이것은 아주 시끄럽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빈 공간의 압력이며, 어찌하여 아이슬란드 사람들이 아직까지 요정이 있다고 믿을 수 있는지 조금은 이해하게 됐다. 나는 얼마 전 사랑이란 무엇인지 묻고 답해보는 워크숍을 진행한 적이 있다. 사랑과 관련한다고 생각하는 책을 하나씩 가져와 소개하고 나누는 자리였다. 한 참여자께서 가져온 책을 펼치곤 한 부분을 모두와 함께 읽었다. 내용은 다음과 같고 이건 내가 후에 다시 책을 찾아봐 옮긴 것이다.



토레: 선생님의 텍스트에서는 통사구조의 중단, 일부 선형적 연속성의 붕괴 및 서술적 분석의 성공으로, 말로 할 수 없는 것의 의미들이 전달됩니다. 선생님이 ‘인쇄상의 공백’(선생님의 몇몇 영화에 리듬을 부여하는 검은 화면처럼)이라고 부르시는 부분과 또 다른 부분 사이의 빈 공간, 스크린에서처럼 지면에서도 나타나는 침묵과 그 뒤에 이어지는 대화, 그리고 단속적인 말들은 언어를 익숙한 맥락에서 분리하며, 새로운 의미작용을 생성하고요.

뒤라스: 언어의 무의식적 자동기술과 결별하고, 시간에 마모된 것들을 정화하는 거예요.

토레: 선생님이 ‘픽션에 대한 노스탤지어’라고 부르시는 독자의 상상력이나 욕망은 이제 더는 서술적 구조에 갇히거나 파묻히지 않고서 자유로워지고 있어요. 디테일의 과도한 축적이 아닌 생략에 의해서요.

뒤라스: 오직 결여와, 연속되는 의미들 속에 숭숭 뚫린 구멍들과, 빈 공간에서만, 무언가가 생겨날 수 있어요.[1]



우리는 그날 워크숍에서 사랑이 가능할 조건으로서의 빈 공간에 대해서 한참을 얘기했다. 가능함의 조건이기도 하지만 또한 위험하고 파괴적인 힘이라는 것이라고도. 생각해 보면 빈 공간은 사랑의 조건이기도 하지만 예술의 결코 포기될 수 없는 조건이기도 하다. 빈 공간이 없다면 예술이라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왜냐하면 픽션은 빈 공간에서 자라나기 때문이다. 글이 쓰이기 위해서는 지면이, 이미지가 나타나기 위해서는 화면이, 진동이 전달되기 위해서는 대기가, 사물이 놓이기 위해서는 자리가 필요하다. 물론 이런 물질적이고 가시적인 차원의 빈 공간만 주어진다고 해서 픽션이 가능한 것은 아니다. 글이, 이미지가, 진동이, 사물이, 그리고 우리가 스스로 아득히 멀리 떠났다가 되돌아올 수 있는 그런 자율적인 공간 또한 필요하다. 현대적인 예술의 역사는 그 공간을 탐색하거나 혹은 그 공간이 협소해지지 않도록 안팎의 적들과 싸웠던 농성의 역사라고도 할 수 있다. 욕망은 다양했을지언정 그 공간만큼은 사수되어야만 했던 것이다. 현대적인 예술가들이 꿈꾸었던 것은 빈 공간이 우리들 사이에 잠재하는 것, 실재하는 사회적 요소로서 함께 살아가게 되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왜 그 빈 공간은 거의 잊히고 소멸해 가는 것일까?



겨울 동안 책상 한 켠에 종이 뭉치가 쌓여 있었다. 종이들은 크기도, 재질도 다르고 제각각 멋대로 접혀 있었다. 한예종 조형예술과의2024년 졸업 전시 ⟪아 다음의 아⟫에 갔을 때 학생들이 저마다 자기 작업 근처에 놓아두었던 인쇄물들을 가져와 모아둔 것이었다. 하루는 마음먹고 종이 뭉치를 가져와 하나씩 펼쳐 다시 읽고, 눈에 띄는 문장에는 밑줄을 긋고, 반듯하게 반으로 반의반으로 접어 도록에서 같은 이름을 찾아 끼워 넣었다. 이름들은 모두 낯설었지만 기억나는 그림들과 목소리가 있었다. 다시 책을 펼쳐 밑줄 그었던 문장들을 한 종이에 옮겨 적었다. 곧이 옮기기도 했고 조금 변형시켜 옮기기도 했다.



새로운 관계, 새로운 서사, 0과 1의 틈, 상상을 통해 비어 있도록 만들어지며, 겉과 속의 구분이 없는, 경계가 무용한, 이쪽과 저쪽을 오가는 운동, 켜켜이 쌓여 덮인 몸짓을 기억하기, 실패하고 잃어버린 보금자리로부터, 상실로부터, 실수나 번복, 수습이 무한히 재생되어도 괜찮을 시공간,현실의 숨구멍, 연약하고 끈질긴 것, 스쳐 지나가는 것, 삭제된 것 또는 무뎌진 것, 확언을 지연, 현실이 부재하는, 온전한 세계를 구축하다, 이미지의 섬과 자율성, 어둠 속에서 작은 존재를 감지하기 위한 기다림, 작은 변화의 현장, 상상과 감각이 스며들 틈,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에 대한탐구, 견고한 것을 균열 내고 이야기를 출현시키는 것, 그림은 균열을 더듬는 것, 사라지고 부서져 재가 되는 모든 것들에 대한 경외심을 가지는 것, 확정적 공간으로 수렴하기 이전의 궤적, 서로에 대한 인지, 쉽게 사라지는 작은 행위들을 보기, 사이 공간의 궤적을 살피며, 말이 사라진대화, 느린 대화, 당신, 춤, 몸과 마음을 뉘일 집을 찾아가는 과정, 타자와 나의 경계가 흐려지는 순간, 간절함, 절실함, 구원, 기도, 경계에 머문 존재들, 현실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오류를 만드는 풍경, 생명의 힘, 살아있다는 느낌, 허구적 가능성의 발견, 제약에 가려진 발아의 가능성, 누군가의 손을 잡고 섰다, 실패할 대화를 반복하면서도 함께할 수 있는 것, 그리고 그 가능성에 대하여, 새로운 공간, 연약해지는 지점, 쉽게 지나칠 수있는 것들의 형태, 개체의 고유함, 불분명한 것들의 생태계, 과열된 분위기와 속도, 다른 것을 상상하게 하는 순간, 존재하기에 대한 새로운 상상, 실체가 없는 것에 대한, 미래.



그렇게 반나절의 시간을 보냈다. 어둑해진 방에 앉아, 끼워 넣은 종이들 때문에 이상한 모양으로 부풀어 오른 책의 두께와 옮겨 적은문장들을 번갈아 보면서, 나는 그들에게 편지를 써야 한다는 충동을 느꼈다. 그들이 내게 자기들이 만든 것들을 되돌아봐 달라 부탁했을 때 기대한 건 편지 같은 게 아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되돌아봄 속에서 무엇보다도 내게 가장 먼저 되돌아와 닿은 것은 작품이 아니라 그들이 세계를 향해 내보낸 신호였다. 바람, 소원, 갈망, 혹은 열망의 신호. 그러므로 나의 되돌아봄은 그들이 만든 것보다는 그들의 열망의 말을 향해야 한다. 그것이 해석이나 이해의 말을 쓰는 것이 아니라 편지를 보내야만 하는 이유다. 내게 되돌아본다는 것의 윤리는 실제 있었던 것보다 부풀려진 것들을 꺼뜨리고 정말로 그것이 무엇이었는가를 적확히 기억하는 것에 있었지만, 나는이번에는 반대로 부풀어 오른 것을 기억하고자 마음먹었다. 어떤 열망은, 가끔은 현실에 대해서 현실 그 자체보다 더 풍부한 말이 되기도 하기 때문에.

나는 옮겨 적은 종이를 한동안 들고 다니며 종종 꺼내 보았다. 이 마음들은 뭘까? 천천히 거슬러 올라가 보면, ‘아 다음의 아’라는 구문에는 다음과 같은 강한 믿음이 결속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다음’이란 것이 있다면, ‘다음’을 사이에 둔다면 ‘아’와 ‘아’는닮았을지언정 같은 것이 아닐 것이라는 믿음. 혹은 그것은 하나의 질문이기도 했다. 닮았을지언정 결코 같은 것이 될 수 없는 서로다른 ‘아’는 어떻게 가능할까? 그리고 그들은 자기의 질문 속에서 자신의 답을 우리에게 제안한다. ‘아’와 ‘아’ 사이에 틈을, 어떤 [공간]을 만들 것. 그들의 서로 다른 말들의 웅성거림은 이 사이의 공간을 뒤덮고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곳을 통해 무언가를할 수 있기를, 그곳에서 무언가를 만나기를, 그곳에서 함께 살아가기를, 그곳을 통해 우리가 새로운 어딘가로 이끌려 가기를.

나는 이 요구가 삶의 감각에서 비롯한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미술이라는 것을 수행하는 주체성으로부터 비롯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질성을 동일화하는 강한 사회적 힘에 대항하여 삶의 가능성을 회복하는 것, 허구에 참여하는 자로서 허구의 가능성을 회복하는 것. 그건 서로 다른 두 길이 아니다. 그들이 조형한 하나의 문장-문학은 삶과 미술 둘 모두를 가능성의 상태로 되돌리고자 하는열망이고, 전망을 위한 윤리이며, 모험에의 제안이다. 그들은 행복한 삶이 아니라 주체적인 삶을, 위대한 예술가가 아니라 다르게 움직일 가능성을, 성취보다는 함께하기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그들은 저마다의 말로 빈 공간을 열렬히 희망한다.

그들의 신호는 겨울 동안 놓지 못한 빈 공간이라는 것에 대한 나의 생각의 시간과 뒤섞였다. ‘아 아’와 ‘빈 공간’은 같은 뜻이 반복되어 문법적으로는 오류이거나 오류에 준하는 것이지만 굳이 오류를 감수해 무한하고 불확정적인 공간을 상상하기를 노력하는 조형적 실천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닮았다. 이것이 우리가 제약과 위압으로부터, 끝없이 축소되어 가는 역량의 자리로부터 스스로를 구하는 방식일지도 모른다. 그 노력은 가능성을 향한다. 가능성을 꿈꾸는 사람들. 어떻게? 미술로써. 그러면 여기서 미술이란 작품이나 전시 같은 이런저런 말들을 초과하고, 세계에 대한 삶의 방법으로써도 성립할 수 있게 된다. 결국 이것은 미술이란 무엇인가, 혹은 무엇을 하는가에 대한 너무나도 거대한 질문에 다름아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을 이미 구했고 알고 있다. 그 앎으로부터 나는 배운다. 그러므로 이 글이 한 통의 편지가 되어 그들에게 읽히기를 바란다.





[1] 마그리트 뒤라스, 레오폴디나 팔로타 델라 토레, 『뒤라스의 말』, 장소미 옮김, 마음산책